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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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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촛불집회서 '87년 민주항쟁' 감동 다시 느낍니다"

미디어활동가 김상패씨 "영상기록, 옴니버스 영화로 만들 것"

2017-03-08 10:38

조회수 : 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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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박용준기자]1961년생으로 올해 56세가 된 김상패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 평범한 직장을 다니던 가장이었다. 그러나 열정적인 ‘시네마키드’였던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손을 댔다가 아예 직종을 옮겼다. 미디어교육센터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운 뒤 다큐영역을 섭렵했다. 지금 그의 이름 뒤엔 다큐감독, 미디어활동가라는 직함이 따라 붙는다. 김 씨는 다큐감독보다는 미디어활동가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 그런 만큼 그는 현장에 더 애착을 갖고 있다. ‘이한열·박종철 열사 죽음 이후 30년’, ‘쫓겨난 아현포차 사람들’을 작품으로 다룬 그는 최근 매주 촛불집회에서 카메라를 잡고 영상기록을 맡아 자원봉사로 광화문광장을 지키고 있다. 김씨를 만나 늦깎이 미디어활동가의 생활과 격동의 ‘386세대’인 그가 현장에서 본 촛불집회의 의미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미디어활동가 김상패씨. 사진/박용준 기자
 
왜 미디어활동가가 됐나.
 
예전에는 미디어와 광고 관련 직장을 다니면서 영화를 하고 싶어서 고독사에 대한 시나리오를 준비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2015년 6월로 직장을 관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준비를 하게 됐다.
상업적인 틀에서 영화에 진입하기 쉽지 않아 고민하던 중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을 양성하는 ‘미디액트’를 만나 독립다큐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한겨레문화센터나 서울영상미디어센터도 있지만 미디액트가 독립다큐 쪽에서는 오랫동안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다른 미디어 교육센터에 비해 진보적이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선을 가진 미디어 활동가를 배출하려 노력하고 지원도 많이 하고 있다.
제가 영웅이 돼서 사회적 약자를 돌본다는 생각까지 감히 하진 못하지만 제가 관심 있는 분야를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50대에 내리기는 어려운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전부터 다큐멘터리 쪽 관심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른 다큐 감독들과 함께 지난해 ‘미디어로 행동해라 In 청주’라는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다.
청주에 갔는데 당시 노조 파괴로 유성기업에 한광호 열사가 돌아가셨다. 다른 업체들도 노조 파괴가 일어나는데 지방에 있다 보니 서울과 달리 소식이 소외됐다. 1년에 한 번 진행되는 미디어로 행동해라는 그 전에는 밀양 송전탑 문제, 삼척 원전 문제 등을 주제로 진행됐다. 청주에서 공룡(공부해서 용되자)이라는 교육생활공동체를 만났는데 그 곳의 젊은 활동가를 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젊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면서 반성을 하면서 내가 힘이 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독립영화나 미디어활동가 일은 돈이 안 된다. 지금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집에서나 친구들은 ‘네가 제일 멋있게 사는 놈이다’라고 응원을 해준다. 저보다도 20~30대 독립영화 감독들이 더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저는 그 친구들에게 ‘결혼을 언제 하려고 하느냐’라고 조언하다 ‘꼰대’라고 한 소리 듣기도 한다.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맘상모’의 활동을 유튜브로 보면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이나 홍대 두리반 강제집행이라든지 특히, 아현동 포차 할머니를 찍고 있는데 작년 8월18일 강제집행을 보면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포장마차 안에 저를 포함해 연대하는 사람 10명이 들어가 있으면서 ‘설마 사람이 안에 있는데 우리한테 해코지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밀폐된 공간 안에도 소화기를 쏘고 포크레인으로 찍어서 사람들을 끌어내는 모습들을 보면서 굉장히 분노를 했다.
맘상모와 활동을 함께 하면서 ‘우장창창(힙합듀오 리쌍의 건물 세입자로 리쌍과 임대문제로 다툼이 불거진 젠트리피케이션의 한 사례)’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반 대중들은 연예인을 상대로 갑질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 우장창창 앞에서 같이 호응해주는 가수들이 공연하며 문화집회를 하고 저도 가서 영상을 찍었다. 그들의 공연 내용을 영상으로 편집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틀고 제 영화도 상영하고 그랬다. 맘상모 모두 서윤수 사장의 뜻을 존중해 함께했기 때문에 법도 바뀌면서 원만한 합의에 이르렀다.
 
첫 작품 ‘Nowwhere’는 어떻게 탄생했나.
 
미디어로 ‘행동하라 청주’와 함께하면서 저는 보쉬의 노조 파괴 현장을 두 분의 감독과 함께 갔다. 저보다 전문적인 두 분이 다 했고 저도 같은 소속으로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저는 옆에서 집기 들고 카메라 빌려주고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미디어로 행동하라 프로젝트가 재밌는 부분은 일주일만에 완성해서 배급을 해 전국에서 상영하는 점이다. 전국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모여서 이슈를 확장시키는데 의미가 크다.
일반 다큐멘터리는 제작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이를 상영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딜레마가 있다. 이를 사회적으로 곧바로 공론화해야 하는데 그 시점에선 상황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쪽으로 끝나면 모르지만, 나쁜 쪽으로 끝나면 허탈한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대표작 ‘오류’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인가.
 
미디액트 수료작이 ‘즐거운 인생’으로 한 30분 분량 정도 됐는데 이를 ‘오류’로 확장시켜 작년 12월 공감 영화제에 출품했다.
올해가 박종철·이한열 열사 사망 30주년이라 1987년 6·10 항쟁이 생각났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지만, 저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전두환 정권에서 잡히면 구속은 물론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해 참여를 하지 못했다. 저랑 같은 시대를 겪었던 젊은 친구들이 올바른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세상을 달리했다.
‘기억한다’라는 큰 얘기보다는, 지금이야 탄핵정국이 와서 그렇지만. 제가 작품을 만들던 작년 2월까지만 해도 많이 경직됐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1980년대로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거리로 나서지 못할 것 같다.
방관자로서의 제 기억이 오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건대 농성도 그렇고 많은 열사들이 분신자살했던 고통, 나아가 우리 아이들이 여전히 그러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만들게 됐다. 30년이 흐르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고생한 학생과 노동자들의 뜻을 기억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탄핵정국이 되면서 영화의 의미가 다소 반감되긴 했다. 굉장히 사적인 다큐맨터리이지만 지금의 50대, 1980년 청춘을 보낸 사람들과 그 시대를 함께 기억하고 싶다. 3월16일 오후 7시30분엔 이토마토 아르떼홀에서 그 때를 기억하는 대중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정부의 독립영화 정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지난해 11월 다른 독립영화인 800여명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퇴행적 문화정책을 비판하는 시국선언문 발표에 참여한 바 있지만 전반적인 부분보다도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미디액트 같은 경우도 광화문에 있다가 이명박 정부 이후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홍대로 쫓겨났다. 직원들 급여도 많지 않아 직원들이 나가서 행사까지 진행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도 녹음식 이용이나 촛불집회 장비 지원이라는지 독립영화 감독이나 미디어활동가들에게 아낌없이 지원해준다.
또 하나는 블랙리스트 관련해서 시네마달이라는 배급사가 있는데 시네마달은 작품성이 우수한 독립영화를 많이 배급하던 곳이다. 시네마달 역시 정부 지원을 하나도 못 받아 직원이 7명에서 4명으로 줄면서 망하기 직전이다. 김일권 시네마달 대표의 경우 김일권이라는 이름으로 지원 요청을 하면 안 되고 시네마달로 하라고 할 정도다. 부산영화제 다이빙벨 갈등 당시 정부의 반대에도 시네마달이 이를 맡아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긴 거다. 심지어 부산영화제 당시 보려고 줄 선 관객들이 많은 데도 정부에서 표를 사재기하면서 정작 극장 안에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 용산사태를 다룬 김일란 감독의 ‘두 개의 문’을 비롯해 시네마달이 좋은 영화를 많이 했는데 이런 곳은 정부에서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목을 움켜쥐니 다 죽어가는 거다.
 
퇴진운동과 함께 촛불집회 영상 촬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촛불집회가 작년 10월말부터 시작을 했는데 첫 집회는 청주에 있느라 못 가고 2차부터 참석했다. 2~3차 집회는 제 영화 오류에 필요한 장면 때문에 개인적으로 갔다. 4차를 앞두고 독립영화 하는 분한테 연락이 와서 미디어팀에 합류하겠느냐라고 제안을 받아 같이하게 됐다.
본 무대 중계팀은 따로 있고 저는 주변에 모습과 전체 부감, 레이저 퍼포먼스, 행진 모습 등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저희보다도 모금통 들고 다니고 촛불 나눠주고 무대 뒤에서 애쓰는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더 고생한다.
시민들이 얼마 전에도 무대 뒤 상황실까지 찾아와 그냥 김밥도 아니고 삼겹살 김밥을 주고 갔다. 한 할머니는 매주 나오는데 오늘은 모금함 통을 못 봤다며, 몇만원이라도 주고 가셨다. 그 분들이 정치적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해도해도 너무하니까 나오시는 것이다.
매주 그 많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어느 당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이 인원은 많지만, 부산, 춘천, 광주 등 전국에서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지방에 있는 감독들과 서울에 있는 감독들 10명이 각자의 시선으로 촛불집회 영상은 1인당 7분 정도 분량으로 만들어 완성한 영화 ‘광장’(가제)을 3월23일부터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진행되는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할 예정이다.
1987년 민주항쟁 때도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옆에서 응원하던 넥타이부대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많은 감동을 받는다.
예전 개성여고 학생들이 1987년 민주항쟁 때 도시락과 생리대를 나눠주었는데 얼마 전에 개성여고 학생들이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르는 모습을 봤다.
 
미디어활동가로서 생산한 미디어를 나누는 채널은 충분한가.
 
저야 영상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입장이지만, 관객 입장으로도 봤을 때 독립영화나 이러한 영상이 아무리 좋더라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기존에 곳곳에 있던 상영관들은 점차 자리를 잃고 쫓겨나고 있다. 멀티플렉스에서 몇몇 상영관을 예술상영관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영화라고 하기 어렵다. 큰 공간이 아니더라도 주민센터, 도서관 등 20~30명만 들어가는 공간이라면 각 지역에서 나서서 플랫폼을 활성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은가.
 
현재 ‘쫓겨가는 사람들’(가제)이라는 영상을 찍고 있다. 철거민들이나 아현포차 어머니들, 우장창창 문제를 비롯해 1900년대 일제 수탈에 의해 만주로 가야만 했던 사람들 얘기까지 담으려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철거와 내쫓김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올해 1년은 쫓겨가는 사람들에 집중하고 내년부터는 ‘공순이’ 이야기를 3년간 계획 중이다. 공장에서 고생한 우리 누나, 엄마들의 이야기, 사우디에 가서 고생한 우리 아빠, 삼촌들의 얘기로 박정희 정권 당시 정말 고생하며 우리 경제를 이끌던 사람들이다.
민주항쟁 이후 1990년대 들어서부터 이 사회에 만연한 유신시대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향수를 걷어내고 싶다.
  
김상패 미디어활동가가 지난 1일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미디어팀 자원봉사자들과 활동하는 모습. 사진/김상패 미디어활동가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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