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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참 잘 뒀네

언론 대응 등 여론 전에서 대변인 역량 돋보여

2017-03-21 23:49

조회수 : 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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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심판에서 ‘막가파’ 변호인단의 자살골로 쓴맛을 봤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번에는 율사들을 제대로 선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형사 변호인단 면면을 보고 중량감이 없다느니, 검사장급 변호인을 선임하려 했으나 다른 국정농단 사범들에게 모두 빼앗겨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느니 하는 말이 많았지요.
 
하지만 이번 변호인단, 만만치 않습니다. 김평우·서석구 변호사가 제외된 것이 전력에 큰 도움이 됐지만 그에 버금가게 공보기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번 ‘국정농단 사건’은 그 엄중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피의자인 박 전 대통령 역시 지금은 파면됐으나 한 달 전만 해도 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숫자가 많이 과장됐지만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시민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박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 돼 조사를 받고 있는 21일 오전 7시쯤부터 오후 11시까지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청사 인근에서 ‘사기탄핵’, ‘헌재해산’, ‘국회해산’ 등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의 역할은 단지 검찰의 칼을 법률로 막는 방패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여론의 흐름을 읽고 어떻게든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공보기능도 수행해야 합니다. 언론인 출신이나 청와대 대변인 출신을 세워 공보를 맡길 수도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형사사건의 피의자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데 변호사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5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변호인단은 꾸려져 있었습니다. 유영하 변호사가 사건 초기부터 맥을 쥐고 있었고, 탄핵심판 대리인단 중 손범규, 채명성 변호사 등이 합류하면서 체계가 잡혔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이 바로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는 손범규 변호사입니다. 사실 손 변호사가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법률가라기 보다는 정치인쪽으로 분류됐습니다. 연세대 법대를 나와 사법연수원을 28기로 수료한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에 삼성물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세계한국평화통일협의회 법률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나라당 부대변인,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 협동실장, 한나라당 경기도지부 대변인, 2006 한나라당 법률지원단 부단장을 거쳐 18대 국회의원(한나라당, 고양시덕양갑)으로 당선됩니다. 제4대 정부법무공단 이사장으로 2년간 근무했으며, 현재 법무법인 정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손 변호사는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가 지난 14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소환 일자를 15일 통보하겠다”고 공표하자 그 다음날인 15일 오전 9시쯤 간사를 통해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단 소속 기자들에게 단체 문자(이른바 ‘풀 문자’)를 보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님 사건 취재에 노고가 많으신 존경하는 언론인 여러분께
 
ㅡ앞으로 최대한 소상히 보고 드려 기자님들의 노고를 줄여 드리고자 합니다.
ㅡ지검 간사님께 보고 드려 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ㅡ한가지 부탁의 말씀은 의뢰인과의 관계에 관한 사항은 변호사의 윤리에 맞지 않는 만큼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뢰인을 만났냐? 어디서 만났냐? 무슨 얘기했냐? 변호사에게 이런 류의 질문은 기자에게 취재원을 밝히라는 것과 같은 성격이오니 답해 올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세요.
ㅡ동아일보에서 소환일자까지 보도한 것 같은데 소환일자는 아직 통보된 바가 없습니다. 통보되면 저희가 알려드릴께요.
ㅡ소환일자가 통보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적극 응하여 수사에 협조할 겁니다.“ 
 
 
풀문자를 받은 기자들은, 적어도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형 사건에서 검찰이 피의자를 소환하는 일정은 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우선 손 변호사가 “소환일자가 통보되면 저희가 알려드리겠다”라고 말한 부분은 좀 과장되게 말해 감동이었습니다. 무쇠 자물통 같은 검찰을 두드리지 않고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소환일정을 알아서 기자들에게 동시에 알려주겠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기서 손 변호사는 기자들로부터 호감을 그야말로 득템합니다. 쭉 빨아들이는 거지요. 이러면 검찰 보다는 박 전 대통령 측에 취재가 몰릴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간파한 겁니다.
 
게다가 손 변호사는 "소환일자가 통보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적극 응하여 수사에 협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사 하나가 또 나옵니다. <박 전 대통령, "검찰 소환에 적극 응할 것"> 물론 그동안 행실로 보아 “나오겠느냐”는 의심들이 많았습니다만 결국 나왔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손 변호사가 스스로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입니다. "의뢰인과의 관계에 관한 사항은 변호사의 윤리에 맞지 않는 만큼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이 부분입니다. 변호사의 직무상 비밀 준수 의무는 여러 법에 규정돼 있지요. 그렇지만 기자들 생리상 어떻게든 박 전 대통령의 신상에 대해 알아내려고 합니다. 손 변호사는 이에 대한 경고를 보낸 것입니다. 뒤에 소개를 하겠지만 실제로 직접적인 경고를 합니다. "앞으로 최대한 소상히 보고 드려 기자님들의 노고를 줄여 드리고자 합니다." 이 낯간지러운 멘트는 애교로 보고 넘어갑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쯤 특수본은 “오늘 오전 9시40분 경, 박 전 대통령 변호인에게 소환통보를 하였습니다. 소환일시는 3월21일(화) 오전 9시30분입니다”라고 공지합니다. 사전 공지 약속을 한 내용입니다. 10분쯤 뒤 손 변호사가 풀문자를 보냅니다. “소환 날짜 통보 받았다.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 역시 앞서 약속한 사항을 지켰습니다. 이어 당일 오후 3시40분쯤에는 공식 멘트를 보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 입장> 박 전 대통령은 검찰이 요구한 일시에 출석하여 성실하게 조사를 받을 것임. 변호인들은 검찰 수사 과정에 필요한 자료 제출 등 제반 절차에 적극적으로 협조함으로써 실체적 진실이 신속하게 규명될 수 있도록 도울 것임.” 넙죽 받아 문 기자들은 받아치기 바쁩니다. 일일이 반응을 묻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호감도가 또 올라갑니다.
 
그 다음날인 16일 특수본은 김창근 전 SK그룹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김영태 전 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부회장), 이형희 SK브로드밴드 대표이사를 소환 조사합니다. 박 전 대통령 소환 닷새 전 재단 출연자금 뇌물 의혹을 확인한 겁니다. 이후 최태원 SK그룹 회장, 장선욱 롯데면세점 사장 등이 줄소환 됩니다.
 
이날 손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출입 기자들에게 풀문자를 보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ㅡ수사는 재판과 전혀 다른 절차로서 수사는 전체과정이 비밀에 속하는 것이지 재판처럼 공개되는 것이 아님
ㅡ따라서 수사대비의 구체적 논리ㆍ방법 등 변론의 전략ㆍ전술까지 언론이 취재하려 하는 부분에는 응하지 않을 것임
ㅡ수사과정인 현 시점에서 구체적인 혐의사실의 인정 여부 등 검사가 행할 법한 질문까지 변호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나 의뢰인과 변호인간의 비밀에 관한 사항까지 취재하는 것에도 응하지 아니할 것임
ㅡ변호인 일부와의 대화내용 일부를 편집·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가감·단정하면서 이를 의뢰인 박 전 대통령 본인의 의지인 것처럼 확대 보도시는 민·형사상 소송 등 법적조치를 할 것임" 
 
박 전 대통령 소환을 앞두고 재벌기업 총수와 핵심 임원들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취재가 과열 양상으로 가자 보낸 경고로 해석됩니다.
 
3월19일 일요일. 오후 3시30분쯤 손 변호사는 단비 같은 풀문자를 보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ㅡ변호인단 활동내용
예상되는 질문을 뽑아내 답변준비하는데 가장 큰 노력을 하고 있음
 
ㅡ변호사 사저 출입현황
유 변호사 이외 다른 변호사들도 필요시 삼성동 출입·전화 중, 다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분들은 나타나지 않게 출입
 
ㅡ역할요약
유영하 변호사는 나무잎까지 자세하게 보실 수 있게 변론준비 중이라 보시면 되고 다른 변호인들은 숲을 보실 수 있게 변론준비 중이라고 보시면 됨, 상호보완 중
 
1.21일 당일 상황
일부는 수행. 일부는 검찰청 미리 도착 대기 예정
 
2.입회자
현장에서 분위기 보고 정할 예정
 
3. 변호사들 이동수단
버스와 무관, 자기가 개별적으로 이동
 
4. 기타 행정사항
검찰이 리드하는데로 따를 예정 우리는 변론준비 중"
 
 
 
어머, 할렐루야!
 
일요일 3시30분이면 조간의 경우 마감이 임박하면서 기자들이 정말 뭐라도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절박함이란 항문이 타들어가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어쨌든 이런 엄중한 시간에, 그것도 출석을 바로 앞 둔 박 전 대통령 측에서 ‘변호인단 활동내용과 사저 출입현황, 역할요약, 출석 당일 상황, 입회자, 변호사들 이동수단, 기타 행정사항’을 기자들 입 안에 넣어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웬만한 중견 기자라면 이 풀문자로 기사 3꼭지는 쓸 수 있습니다.
 
3월20일. 박 전 대통령 소환 조사 하루 전입니다. 역시 손 변호사는 또 하나의 큼지막한 선물을 투척합니다.
 
"내일 검찰출두에 즈음하여
 
ㅡ입장을 밝히실 것이다.
ㅡ준비하신 메시지(메시지)가 있다.
는 확인해 드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입장표명 장소ㆍ표명할 내용 등 더 자세한 것은 제가 알 지 못함"
 
 
 
아싸 가오리!
 
▲입장을 밝힌다 ▲메시지가 있다 ▲장소와 내용은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 합니까. 시간도 절묘하여 풀문자가 날아든 시각은 오후 2시10분쯤 이 때부터 각 언론사는 밝힐 입장이 무엇이냐, 메시지가 무엇이냐를 가지고 온갖 분석과 해석, 해설, 전망을 합니다. 기자들은 전문가들을 찾아 전화를 돌립니다. 당일 방송사 메인뉴스에는 당연히 헤드라인으로 걸리고, 다음 날 조간신문에서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시사토론 프로에서는 패널들이 상상력을 총 발휘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언론은 또 하루를 때웠습니다.
 
3월21일 검찰 소환 당일.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 공보기능이 유감 없이 빛난 날입니다.
 
우선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실로 들어간 뒤 오전 10시10분 또 풀문자가 옵니다. 
 
"현재 입회자
ㅡ유영하·정장현
조사실 대기자
ㅡ손범규·서성건·이상용·채명성"
 
주요 피의자가 검찰 소환 조사를 받으러 오면 변호인으로 누가 왔는지, 입회는 누가 했는지 등은 주요 취재 대상입니다. 검찰은 "안알랴줌"
 
손 변호사의 풀문자가 온 직후 특수본도 이날 상황을 풀문자로 설명해줬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청사로 들어간 뒤 누구를 만났고 변호사 누가 동석했고, 박 전 대통령은 무슨 말을 했고, 이후 조사는 몇시에 시작했고, 입회 한 변호사는 누구고…" 아 검찰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검찰 풀문자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영상녹화에 동의하지 않아 영상녹화는 하지 않기로 함."
 
이 부분을 기자들이 놓칠 리 없습니다. 상당수가 <박 전 대통령, 조사과정 녹화·녹음 거부>라고 타전합니다. 이 때 박 전 대통령 측에서 풀문자를 날립니다. 
 
"ㅡ녹화를 거부한 사실 없음
ㅡ법률상 피의자에게는 검찰이 동의여부를 묻지 않고 그냥 녹화할 수 있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여부를 물어왔음, 그에 대해 부동의함을 표시함
ㅡ이를 두고 녹화거부한 거라고 한다면 난셋스(난센스)·비문
ㅡ그 이상 저는 모름"
 
변호인들이 실시간 언론 모니터링을 하고 대응한 것입니다. 해명성으로 낸 것이지만 이게 검찰로 화살을 돌립니다. 일부 언론은 “봐주기 수사 아니냐”며 검찰을 비판합니다. 결국 이날 검찰은 박 전 대통령 조사과정 녹화·녹음 생략 이유에 대해 해명해야 했습니다. “조사기법상 녹화·녹음을 하게 되면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할 수 있어 하지 않았다. 조사 전 녹화·녹음은 피의자의 동의를 받아서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반 피의자들이 조사과정 녹화·녹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군요. 그러나, 나중에 공판에 가서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 진술을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 사건은 일반 사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됐든, 사실 박 전 대통령 측이 날린 풀문자를 검찰이 말미이 간단하게나마 덧붙였다면 오해는 덜 받았을 겁니다.
 
여담으로 검찰에 소환된 박 전 대통령의 의상과 점심·저녁식사 메뉴를 언론은 경쟁적으로 보도했습니다.
 
한 언론에서 “박 전 대통령이 삼성동 사저 요리사가 싸준 김밥과 샌드위치, 초밥을 변호인들과 나눠먹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쓰자 손 변호사가 또 풀문자를 보냅니다.
 
 
"도시락에 초밥은 유부초밥을 의미함. 생선초밥이 아님"
 
뭐 이런 것 까지 세세히 밝히느냐 웃었지만, 뒷맛은 ‘아차’ 싶었습니다. 군사반란 혐의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초밥을 주문해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선초밥은 대체로 유부초밥 보다 비싼 고급 음식입니다. '국민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이 사저 요리사가 싸준 생선초밥을 점심으로 먹었다.' 이렇게 되면 국민적 반감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손 변호사의 저 풀문자는 비록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오해로 인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해소했습니다.
 
자. 방금 전인 21일 오후 11시40분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조서열람을 끝내면 귀가 합니다. 얼마나 성심 성의껏 진실을 밝혔는지는 모르겠으나 박 전 대통령의 여론전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영민한 변호인단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 변호인들 수임료를 얼마나 받을까요?
 
 
뇌물수수 등 13개 범죄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 전대통령 측 손범규 변호사가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현관 출입문에서 안쪽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뇌물수수 등 13개 범죄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 전대통령 측 손범규 변호사가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현관 출입문에서 안쪽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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