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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겉은 초현대, 속은 구닥다리인 대선 토론

2017-04-25 06:00

조회수 : 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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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장미대선을 앞두고 새롭게 등장한 이슈는 아마도 스탠딩 토론이었을 것이다. 주요 다섯 개 정당의 대선후보가 각각 시간을 배정받아 특정 후보를 상대로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시스템으로, 한국에서는 이번 대선에 처음 등장했다.
 
스탠딩 토론을 놓고 시작 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모 후보는 2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은 고역이라고 주저했고, 모 후보는 2시간도 못 버티는 사람이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며 반박했다. 추격하는 입장에 있는 주자들은 이번에야말로 끝장 토론을 벌이겠다며 스탠딩 토론을 반전의 기회로 노렸고, 언론 또한 이 토론이 이번 대선의 에센스(본질)인 것처럼 선전했다. 이에 따라 유권자들의 기대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러나 스탠딩 토론이 정작 벌어진 지난 19·23일 밤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한국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듯, 후보자가 원고 없이 필기구와 메모지만 갖고 토론에 참여한다고 하는 방식부터 아이러니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 엘리트들에게 수능시험 치는 고등학생들처럼 이런 제약을 둔 것은 그간 정치 엘리트들이 얼마나 남들이 만들어준 페이퍼를 읽는데 급급했는지를 보여준다.
 
형식은 그렇다 치자. 내용 또한 얼마나 형편없었던가. 미국의 최신식 시스템인 스탠딩 토론을 도입해 토론전을 벌이는 다섯 후보들의 주제들은 얼마나 구닥다리였는지 모른다. 시청자들이 이슈화해주길 고대했던 주제는 온데간데없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단골 메뉴만 재등장했다. 청년들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대북송금 이야기로 옥신각신했고, ‘주적’ 이야기로 난타전을 벌였다. 심지어 단 한 명의 후보도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거론한 ‘주적’이 국방백서에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누구도 이런 진부한 주제들을 제쳐놓고 당면 과제인 청년실업이나 인구절벽, 경제위기 등을 놓고 설전을 벌이자고 치고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거는 회고적일 수도 전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조기 대선만큼은 전망적으로 전개해야 할 절체절명의 사명이 있다. 북풍한설에 16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든 근본적인 까닭은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스탠딩 토론에 나온 대부분의 주자들은 과거 파헤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프랑스에서도 지난 달 20일 첫 번째 텔레비전 토론이 있었다. 대선후보 총 11명이 초대되지 않아 사회적 논쟁이 크게 일었지만, 최종 참여자는 엘리제궁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유력주자 5명이었다. 모든 장르의 스캔들과 사건들로 점철된 몇 개월간의 캠페인 끝에 벌어지는 첫 번째 설전이라 국민적 관심도 컸다.
 
프랑스는 43년 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결을 벌인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 토론이 도입되었고, 그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따라서 이제 TV 토론은 대선에서 필수사항이 되었고, 여기서 다루는 이슈도 대부분 정해져 있다. 이번 대선 토론의 주제는 ‘프랑스를 위한 사회 모델은 무엇인가’, ‘프랑스를 위한 경제 모델은 무엇인가’, 그리고 ‘세계 속에서 프랑스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였다. 5명의 후보는 아고라 광장처럼 원형으로 둘러서서 서로 바라보며 2시간30분 동안 세 개의 큰 주제에 대해 설전을 주고받았다.
 
도입부에 각 후보들은 30명 정도의 지지자들을 포함한 총 400명의 대중들에 둘러싸여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최대 1분30초 내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서로 설전을 벌였다. 각 후보는 50분 동안 각 주제별로 자신의 프로그램과 전략, 철학적 소신을 심도 있게 피력하며 불꽃 튀는 공방을 거듭해 갔다. 이 토론에서는 우리처럼 후보들이 필기구와 메모지만 가져가야 한다는 그런 우스꽝스런 조건은 없었다.
 
이처럼 한국과 프랑스의 스탠딩 토론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다. 물론 프랑스는 우리처럼 국토가 양분된 특수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대선국면도 많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양국의 TV 토론 내용을 단순 비교해 우열을 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1차 스탠딩 토론을 보고 느낀 솔직한 심정은 씁쓸함 그 자체였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스템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토론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능력이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서구의 스탠딩 토론을 도입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누차 강조하지만 우리 정치의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왕적 권력으로 군림하며 국가를 개인 소유물로 여겼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어의 몸이 된 지금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구습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최첨단 방식을 도입해 정치의 겉만 번드르르하게 바꾸려 하지 말고 속도 멋지게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정말 달라질 때다. 언제까지 민심을 호도하는 색깔론과 대북송금, 그리고 주적 이야기로 밤을 샐 것인가.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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