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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향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17-05-16 17:05

조회수 : 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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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기 싫어 앞장을 뒤적거리며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책 표지를 묵묵히 바라봤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다. 라이트 노벨이 가진 편견까지 더해져 요상한 제목으로 시선이나 끄는 수준 낮은 책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지 않으려고 했으나 너의 췌장이 먹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2000년대 초반 열독했던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과 같은 성장소설을 읽을 때처럼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했고 그가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워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무슨 책을 좋아하냐는 질문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작가는 <인간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다. ‘내가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라는 그는 자신의 지론에 맞게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타인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현실 세계보다는 소설을 읽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그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재밌게 살아가고 있었다. 맹장수술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공병일기>를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소설책인줄 알았던 그 노트는 같은 반 여학생이 쓰는 일기장이었다. 췌장의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가 투병(鬪病)이 아닌 공병(共病)을 하며 쓰는 노트였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라이트 노벨답게 청소년들의 연애담을 담고 있으며 시한부 인생이라는 신파적 요소도 담겨있다. 이미 비슷한 류의 영화와 소설을 섭렵한 사람들은 지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읽다보면 그것만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어 손에서 놓지 못한다.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는 남학생과 사랑에 빠질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사쿠라다. 그가 자신은 풀잎배, 그녀는 쇄빙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쿠라는 씩씩하며 밝고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면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여느 작품 못지않게 유쾌하고 순수하며 진실하다.


스미노 요루 작가가 생각한 성숙은 아마도 인간의 변화 그 자체일 것이다. 타인과 교류하는 기쁨을 알게 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고, 강한 힘을 거스르는 일 없이 우연과 운명에 따랐던 그가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분명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 사상가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사물과 달리 사람은 어떤 목적으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변화의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아무튼 결말이 뻔함에도 즐겁게 읽었던 이 책의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소개하며 이만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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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통통 튀었기 때문에 나는 별수 없이 질문에 답해주었다.


강한 힘을 거스르는 일 없이 풀잎 배처럼 그냥 둥둥 떠밀려가며 살기로 마음먹은 나는 결국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정확히는 거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약속 장소에 나오고 말았다.


췌장은 네가 먹어도 좋아.”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도 외국에는 있다던데.”


테이블의 나이테를 보며 평소에 생각한 것들을 책상에 늘어놓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지론도 평소에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물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혀를 쏙 내미는 그녀, 농담처럼 말할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진심이라고 받아들였다. 말은 때때로 발신하는 쪽이 아니라 수신하는 쪽의 감수성에 그 의미의 모든 것이 내맡겨진다.


 


우후후훗,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야. 어제, 한 남학생의 사랑 고백을 받은 몸인데.”


? 무슨 소리야, 그게?”


뜻하지 않게 나는 순순히 깜짝 놀라버렸다.


그런 나를 보고 매우 만족했는지 그녀는 입 끝을 한계까지 치켜들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얼마나 분통 터지는 표정인지.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를테면 그 친구처럼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날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것뿐이니까.


그 말에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젖은 교복을 넣을 봉투와 옷, 그리고 약속한 책을 빌렸다. 나는 입수한 책은 순서대로 읽기 때문에 현재 책장에 쌓여있는 책이 먼저다, 그래서 오늘 빌려가는 이 책을 읽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라고 말하자 그녀는 일 년 안에 돌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즉 나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사이좋게 지내기로 맹세한 것이다.


 




그녀에의 궁금증은 전에 이 게임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 같은 사람이 만들어지는가. 실은 좀 더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 더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든가.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당연히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할 용기도 나에게는 없었다.


 


수많은 농담을 했고 수없이 웃었고 수없이 서로를 매도하고 수없이 서로를 존중했다. 마치 초등학생 같은 우리의 일상이 너무 좋아져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제삼자적인 내가 나를 보며 놀라곤 했다.


 


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사실은 풀잎 배 따위가 아니다. 휩쓸려 가는 것도 휩쓸려가지 않는 것도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한다.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왜 너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라는 거야...


너는 나를 네 안의 누군가로 만드는 게 두려웠던 거 아닐까?


네가 부르는 내 이름에 의미가 붙는 게 두려웠다든가.


머지않아 잃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나를 친구연인으로 만드는 게 두려웠다든가.


 


나는 말이지, 너를 동경했어.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도 단지 자신 혼자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너를 나는 동경했어.


친구라느니 연인이라느니, 그런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네가 나를 선택해준 거잖아.


  




우리는 방향성이 다르다고 그녀는 곧잘 말했다.


당연하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든 서로를 보고 있었다.


정반대 쪽에서 항상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알지 못했을 터였는데, 깨닫지 못했을 터였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만났다, 그녀가 둘 사이의 장벽을 훌쩍 뛰어 넘어 내게로 와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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