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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오늘의 일기)택시운전사

2017-08-08 11:46

조회수 :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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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1988년 나는 경상도 마산에서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광주에 대한 첫 인상은 골목에 엄청난 양의 개똥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마산의 의리의리한 복지아파트에서 살면서 이사온 광주는 깊디 깊은 골목과 개똥, 코를 흘리는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먼저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나에 대한 인상은 이웃들에게는 처음에 좋지 못했다. 


당시 기억나는 것은 '제4수원지'였다. 


광주댐 제4수원지에서 무슨 사건이 발행해 시민들이 식수로 활용한다는 것에 굉장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철규 열사 사망 사건이었다. 


5.18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던 학생들 중 그분은 아주 잔인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온 동네 골목골목에 당시 열사의 불에 그을리고 찟겨진 시신이 담겨진 '대자보'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찢지 않았다. 8살인 나도 익숙한 그림이라 혐오감이나 무서움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 


공안경찰에 의해 시신이 심하게 훼손될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불에 태워진 열사는 그렇게 광주댐 제4수원지에 버려진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는 매일 분노했으며 치를 떨었다. 


최루탄은 학교까지 날아오고 대학생들은 최루탄에 취해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한번은 촛불을 켜면 최루탄 냄새가 없어진다며 방에서 가족들끼리 모여 촛불을 가운데 두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상이 뭔지 모르는 당시 8살 소년인 나는 도망다니는 형, 누나들과 똥파리 옷을 입고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전투경찰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광주는 가난했다. 당시 첨단지구나 상무지구 같은 번화가는 없었고 지금의 쌍촌동도 황무지였다. 가끔 지인들을 페북을 통해 보면 여전히 광주는 가난한 것 같고 1년에 한두번 방문할때도 여전히 가난해 보인다. 


8살에 방학숙제로 그림일기를 그리면서 "최루탄 터진다 문닫아"하는 30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TV에서는 민혜경의 섹시한 미니스커트 노래가 울려퍼진다. 


TAXI driver




I came to Kwangju city when I was 8 years old then. I thought when I arrived at first Kwangju, so dirty without hygine, rolling dog's poo, that was my first impression.

I used to tell Kyeong-sang Do dialect then, so first impression of me was not good at all to neighbors and friends.

I can remember peril ruckus in Kwangju 1988 then. Kwangju dam the fourth reserviour murder occur illegally, Lee chul-kyu.


he was a university student who insisted real fact and punishment to gunfire suspcet. so many student protestor were parading on the street and argued against military government then.


one of them, Mr. Lee, were killed by combat polices desperately by illegal method.

Kwangju citizens then were not scary about corporal and mental repression, even they did support student protestors and gave a supplement food and appliances.


Kwangju is not too poor to get by, keep the pot boiling now comparing past, nothing changed yet.


When I was 8-year-old, I used to reminisce that situation and witness poor and desperate circumstance in Kw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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