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권익도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2화)한글에 바친 삶

“오로지 모국어였고 모국어의 큰 사전이었다”

2017-09-25 08:00

조회수 : 12,749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여러 해 전 파리 시내에서 열린 한국음식 홍보행사를 본 적이 있다. 수십 명 분량의 대형 비빔밥과 흥을 돋우기 위한 풍물패의 공연이 현지인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문제는 풍물패가 들고 있던 깃발의 문구가 굳이 한자로 쓸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자로만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어떤 현지인들은 한국이 ‘중국문자’를 사용하는지 묻기도 했다. ‘한류’ 상품에 속하는 TV 드라마(현대극)에도 한글 없이 한자만 등장하는 장면이 가끔 보인다. 한국문화에 문외한인 외국인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지는 못할망정 한국이 중국문자를 쓰는 나라로 오해받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보70호 간송해례본 중 진품인 해례 4-2쪽(위)과 18-2, 간송본 중 이용준이 손으로 쓴 복원안(위작) 부분. 사진/뉴시스
훈민정음의 철학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천지자연(우주만물)의 원리인 음양오행과 성리학의 우주론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소리는 음양의 이치와 오행에 근본을 두고 있는데, 훈민정음은 이 목소리가 나는 음성구조를 본떠 만들었으니 자음과 모음의 각 소리들은 음양오행에 부합하고 사계절, 오음(궁상각치우), 방위에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중성(中聲), 즉 중간소리가 되는 모음들의 기본인 아래 아(ㆍ), 으(ㅡ), 이(ㅣ)가 각각 하늘, 땅, 사람을 본떠 만들었고, ‘아’(ㅏ)나 ‘어’(ㅓ)의 용례에서 보이듯이 “우주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한다”(取天地之用發於事物待人而成也)는 설명에 이르게 되면 그 철학적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또한, 하늘의 일인 초성(일어남)과 땅의 일인 종성(멎음)을 잇대는 중성이 사람의 일이어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되 그 조절과 보충은 반드시 사람에 힘입음과 같다”하여 사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 한글은 조심스러웠다
나라 안의 중신들 유신들
한글
이 새 글자를 능멸할 터
나라 밖의 명나라 황제가
이 새 글자를
불충불온으로 여길 터
근심스러웠다
 
그러나 이 새 글자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였다
아버지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이 글자로 지었다
아들 수양은
<석보상절>을 이 글자로 지었다
 
등극 직후에는
불교를 배척하여
오직 양종으로 통폐합
거의 절도 없애고
노비와 토지 몰수하고
승려도 내쫓아버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궐내에 내불당을 지었다
 
그런 왕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펴내고
아들 수양이
석가일대기를 지어 펴내니
이로써
나라글자 한글은 불교의 서사세계에 외오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시내가 가람 되고
가람이 바다 되어
새 글자는 조심스러이 흘러갔다 흘러 흘러 듬쑥 퍼져갔다
(‘한글창제의 첫일’, 26권)
 
세종대왕이 그토록 골몰하며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실제 사용해보아 검토한 후 1446년 마침내 이를 반포하였으나, 한자만 ‘진서’로 떠받드는 유생들에 의해 한글이 '언문' 또는 여자나 배우는 '암글'로 불리며 천대를 받았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추종하던 성리학의 원리가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유생들의 반대를 받았던 훈민정음, 백성의 글인 이 놀라운 문자의 매력은 언어학적, 철학적 깊이에도 있겠으나, 가장 큰 의의는 물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 왕이―대부분의 위정자들이 백성을 우매화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인 문자를 주었다는 데 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놓인 훈민정음 문구 석판에 비치는 세종대왕 동상의 모습. 사진/뉴시스
 
한글을 뿌리내리게 한 사람들
주시경(1876~1914) 선생은 국어와 국문을 숭상해 사용하는 것이 백성의 자국성(自國性)을 장려하고 그로 인해 나라를 보존·흥성케 한다고 강조했다.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되던 해에 태어나 조선(대한제국)의 몰락과 식민지 시대의 시작을 겪어야 했던 그는 마흔이 채 안 되는 짧은 생을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온전히 헌신했는데, 이는 곧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분투였다. 그는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일했고 한글 전용과 맞춤법 제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것도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주 보퉁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이 학교 저 학교를 바삐 오가며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방학 때는 하기(夏期)국어강습소(1907년)를 개설해 일반인들을 가르쳤던 주시경은, 국어연구학회(1908년)를 조직하고 상동청년학원 내 국어강습소(1909년)를 개설해―일제 강점 이후 각각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와 조선어강습소(한글배곧)로 개칭되었다―국어와 한글 보급에 힘쓰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조선어강습소는 1911년 조선어강습원으로 바뀌었는데, 이 조선어강습소 제자인 최현배(1894~1970)와 김두봉(1889~?)은 해방 후 각각 남과 북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기여하게 된다. 이들이 같은 스승의 제자였던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남과 북의 한글 표기 방식은 거의 같은 원칙을 따르게 되었다.
 
1970년 3월 외솔 최현배 세상을 떠났다
그 강인한
그 욕심 털어낸 광대뼈 어떤 요령도 없다
그 동요 없는 마른 얼굴
< … >
키는 잘 대패질한 재목인 양 굽은 데 없다
 
소나무 한 그루에다
길은 오직 곧아버린 한길
한글
한글로
일제 감옥 4년도 보냈다
 
한말 주시경 이래
한글 말본
말본
한글갈
한글 가로글씨 독본
한글만 쓰기
 
그리하여 가령 이화여자대학교도
배꽃계집큰배움터가 옳았더뇨
 
누구 한번 슬쩍 속여보지 못한
막다른 골목
꽉 막아선
그 불안의 의지
 
어쩌다 웃음조차도 웃음이 못되었다
(‘배꽃큰계집배움터’, 15권)
 
최현배 선생의 “일제 감옥 4년”은 1942년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한 것이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시작한 조선어학회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한다. 일제가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1936년)과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1941년)을 공포하고 탄압과 한글말살정책을 가속화하던 때,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던 조선어학회의 회원과 관련자들이 1942년 10월1일부터 1943년 4월1일 사이 모두 33명 검거되는데 이것이 조선어학회사건이다. <만인보>는 이와 관련해 우리가 잘 아는 두 국어학자, 정인승(1897~1986)과 이희승(1896~1989)도 소개하고 있다.
 
모국어만을 들여다보았다
조용히 놓인
책상 위의 돋보기가
그의 정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 장수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식민지시대
조선어만을 들여다보았다
 
겨레의 주체 빼앗겼을 때
겨레의 서술주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 갇혀
콩밥 씹어삼키며
콩이라는 말
밥이라는 말이
모국어임을 날마다 되새겼다
 
해방과 함께 세상에 나와서도
오로지 모국어였고 모국어의 큰사전이었다
해방 직후
그의 <한글독본>이 첫 교과서였다
그의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이
< … > 교과서였다
 
흡사 대륙의 무장다운 앞모습
인자한 뒷모습
동저고리 바람의 인기척 한두 번이 묵은 합죽선의 인품이었다
(‘정인승’, 15권)
 
키가 작아
서울의 북악
남산
낙산
아니 인왕마저
함께 키를 낮춘다
 
곱게
가을 햇볕에 물들어
곱게 곱게
쪼글쪼글한 대춧빛
그 대추 속
단단한 씨들이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평생 욕도 못한 입
화내거나
떠벌리거나 해 보지 못한 입에
밥 한 숟갈 넣어
50번은 씹어 넘긴다
딸깍발이 선비라 하지
모두들
딸깍발이 선비의 나막신이라 하지
< … >
 
그는 모국의 말과 글에 파묻혔으나
무슨 큰 학문이나
큰 사업도 없이
더러 시조도 썼고
벙어리 냉가슴
수필도 썼다
 
어김없이 반독재 반열에 은근히 이름을 올렸다
세상 떠날 때도
요란한 기적소리 없었다
보리밭 노고지리도 울지 않고 적적했다(‘이희승’, 10권)
 
한편, 종두법의 보급으로 유명한 지석영 역시 한글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어려운 한문 버리고 / < … > / 쉬운 한글 가로쓰기로 쓰자고 하였”던(‘지석영’, 10권) 한의사이자 한글학자이다. 지석영과 주시경은 1907년 정부가 학부(學部) 안에 설치한 ‘국문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니, 이들과 주시경의 뛰어난 제자들의 공헌이 있어 훈민정음의 뜻이 지켜져 왔다고 하겠다.
 
한글을 논하는 자리에서 4001편의 시를 담은 <만인보>가 더욱 빛나는 것은 고은 시인이 그 안에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혹은 생소한 낱말들을 다양하게 선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언들과 구수한 사투리, 북한어에 이르기까지 독자로 하여금 종종 사전을 찾아 새롭게 모국어를 익히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 <만인보>이다. 그 한 예가 앞의 시에 나온 “딸깍발이”인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일상적으로 신을 신이 없어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 설명하고 있다. <만인보>에서 만나는 북한어들은 고은 시인이 지난 십여 년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사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해왔음을 상기시킨다. 지난 70년 동안 점점 달라져가는 남과 북의 말과 글을 만나게 하는 것은 통일을 준비하는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권익도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