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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노회찬의 명함

배려와 평등의 아이콘, 스러지다

2018-07-23 20:42

조회수 : 2,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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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23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떡값검사들이 98년 세풍사건 수사 당시 요직에 있으면서 삼성을 앞장 서 보호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04년. 제가 신생 법률전문지 소속 초년병이었을 때.
 

그해 대법원 국정감사장에서는 법원행정처 법관들을 시어머니처럼 아주 매섭고도 호되게 야단치던 한 초선 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원의 판결문이 민간기업으로 유출돼 당사자들의 개인정보 침해사례가 심각하다는 문제점을 질타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질의가 논리정연하고 거침 없던지 처장을 비롯한 고위 법관들이 주눅이 들 정도였지요.
 

특정 기업의 판결 전수 수집과 영리적 이용은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를 지적하는 전례가 없었거니와 법원으로서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도 했는데, 그 초선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 금기를 공개적으로 깬 것입니다.
 
 
잠깐 감사를 쉬는 시간에, 저는 그 기업이 어디인지를 묻기 위해 초선 의원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먼저 그를 에워 싸고 있는데다가, 참 대범치도 못했던 저는 그 옆쪽에 쭈뼛거리고만 있었더랬습니다.
 

그 때 그 초선의원이 저를 보고 먼저 말을 걸더군요. "거기 기자님, 뭐 궁금한 것 있어요?"
 

처음 가까이서 대면하는 '높은 분'이라 바짝 얼어서 얼굴이 벌개지고 질문도 더듬더듬 했습니다만, 그의 배려로 제가 원하는 취재는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제 명함을 건네니 그 초선의원도 답으로 명함을 줬는데, 요란한 것 없이 아주 하얀 바탕에 꼭 필요한 것들만 적혀 있던 것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그 명함에 크고 까끌까끌하게 박혀 있던 '점자'가, 지금도 제 손끝과 마음 표면에 선명한 감촉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다면 많은 고관대작들의 명함을 받아봤습니다만, 그들 중 어떤 이의 명함에서도 그런 '배려'라는 각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 이후 그 초선의원과 저는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3선 의원에 오르는 동안, 저 역시 어찌어찌 이곳을 떠나지 못하면서 내심 그를 의지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기습같은 날카로운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묵직한 슬픔이 되어, 제 가슴을 누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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