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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토마토칼럼)발령되지 않은 계엄령의 '유탄'

2018-08-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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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약 5개월의 시간은 기자에게도 비극과 고통의 나날이었다. 처음 두달 동안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지만 2016년 12월부터는 정신적·육체적 노동의 강도까지 한층 세져 적잖이 곤욕이었다. 
 
나름 현장체질이라 웬만큼은 버텼지만 나중에는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그러나 춥고, 배고프고, 잠을 못 자는 것이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첫째는 유린당한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었고 둘째는 직업적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때 특히 기자를 괴롭힌 것이 있었다. 기자는 당시 개인 SNS를 통해 촛불집회 현장이나 탄핵심판 소식, 특검 수사 소식을 간간이 게시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소위 말하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악플을 다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는데다가 그와 워낙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자는 물론 기자가 속한 회사, 촛불집회 시민들에 대한 공격이 선을 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무슨일에서인지 그는, 기자와 대면하거나 전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하지 않았다. 오직 기자의 기사와 SNS 게시글에만 집요함을 보였다. 내가 알던 그와 아주 달랐다. 이러저러한 과정 끝에 결국 그와 나는 절교했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국방부 특별수사단이 2일 ‘기무사 계엄문건’ 의혹을 발표했다. 군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기자는, 앞서 익히 알려진 내용 외에 별다른 내용이 나오질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계엄의 타깃은 촛불집회 시민을 직접 겨냥하고 있었고, 계엄 발령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도 진행됐다. 이제 겨우 중간수사 결과일 뿐인데, 그 실체는 이미 '5.16 쿠데타'와 '12.12사태'의 망령을 아주 가까이 까지 부르고 있었다.
 
탄핵결정 다음날 광화문에 모인 촛불집회 시민은 65만명, 전국적으로는 70만명이다. 당일까지 촛불집회 총 누적인원이 1600만명이었으니, '탄핵 기각' 결정이 나왔으면 당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훨씬 웃돌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계엄 문건대로라면 그 많은 시민들이 기계화사단의 전차와 장갑차, 무장 공수여단의 진압봉 아래에 꿇어 앉혀졌을 것이고, 항거가 계속된다면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비극도 이어졌으리라.
 
천우신조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수사단의 발표 뒤 기자는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없었던 편두통이 생기는 듯하다. 기무사가 계엄 문건을 작성하던 바로 그즈음, 온갖 악플로 나를 괴롭히던 그의 악몽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계엄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잠깐이었던 그 수일간의 여파는 20년 지기이자 기무사 장교인 그와 나를 한 순간에 찢어 놓았다. 기자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어찌 이것이 기자만의 생각이랴. 계획단계에서 멈춰,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 아니라는 말을 그들은 해서는 안 된다.
 
 
최기철 사회부장(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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