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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정치문제 속 마르지 않는 이산가족의 눈물

2018-08-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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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정경부 기자
이산가족 상봉은 언뜻 보면 인도적 행사지만, 사실 정치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박정희정부 시기인 1971년 첫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할 때도 상당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체제경쟁에서 북한에 어느 정도 우위를 점했다는 판단에, 그 해 4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남북교류·협력 활성화 주장을 하자 이슈를 야당에 뺏기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측도 적십자회담서 미군철수·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들고 나오며 협상장은 정치선전의 장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렇다 보니 첫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이르러서야 성사됐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남북은 상봉행사 진행 시에도 정치적 효과를 빼놓지 않았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정세현의 정세토크>에서 1985년 우리 측 이산가족 50명이 방북했을 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영덕 대한적십자사 부총재가 이산가족 방문단을 데리고 올라갔었는데, 북한이 김일성경기장에 군중을 잔뜩 모아놓고 그 사이에 이씨의 누님을 데려다놓고 남매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답니다. 그런 계획이 사전에 감지돼, 우리 측이 공연 관람을 중단하고 돌아오면서 결국 판이 깨져버립니다.”
 
의도와 과정이야 어찌됐든 이산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상봉 행사가 이어졌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 합의를 토대로 2007년까지 16차례의 대면상봉, 7차례의 화상상봉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정부 출범 후에는 각각 두 차례의 상봉에 그쳤다. 이 와중에 이산가족 생존자 수는 지난달 말 기준 5만6000여명으로 줄었다.
 
문재인정부 들어 첫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20~22일 금강산에서 진행됐다. 행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건강 문제로 둘째 날 단체상봉에 나오지 못한 우리 측 가족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는 점이다. 이산가족들의 고령화·건강 문제가 심각함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작별상봉 당시 이들이 나눈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는 마지막 인사는,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공허하게 들린다.
 
나머지 5만6000여명은 이 장면마저 TV를 통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지난 6월25일 상봉 대상 선정결과 자신이 탈락했음을 확인한 한 할아버지가 낙담하며 “저는 이제 이산가족은 끝났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겹쳤다. 그토록 기다리던 상봉 대상에 선정됐음에도 건강 상 이유로 방북길에 오르지 못한 가족들의 안타까움은 말할 것도 없다.
 
65년, 혹은 그 이상을 기다린 끝에 이뤄진 2박3일 상봉은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 2014년 2월20~25일 진행된 19차 상봉 후 대한적십자사가 진행한 건강·심리상태 전화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27%가 “상봉 후 생활에 불편이 있다”고 답했다. 북에 있는 가족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응답부터 그리움으로 인한 불면증까지 내용도 다양했다. 상봉 후 현재 심정을 묻는 질문에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답까지 나왔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리자 정치권에서는 전면적인 생사확인과 상봉정례화, 상설면회소 설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기적인 상봉행사는 물론 전면적 생사확인, 화상상봉, 상시상봉, 서신교환, 고향방문 등 상봉 확대방안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부도 이를 본격 협의해 나가겠다는 입장이지만 북측이 전향적으로 나설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에는 답변이 궁색해보인다. 정부·여당 관계자들의 발언이 과거처럼 담론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이 와중에 남은 이산가족들의 기다림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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