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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권일

‘브레이크 없는 벤츠’

2018-11-28 13:32

조회수 :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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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의 눈물’이 화제가 됐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한종선씨 등 피해자 30여명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당시 검찰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였다면 형제복지원 전체 인권침해 사실이 밝혀지고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후속조치도 이루어졌을 것”이라며 울먹였다. 검찰총장의 눈물어린 사과 한마디에 피해자들 가슴 속에 응어리진 30년 한이 한꺼번에 풀리지는 않았겠지만, 국가기관을 대표한 검찰총장의 사과는 만시지탄과 함께 사필귀정을 떠올리게 한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부산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들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그날 문무일 총장의 사과 자리에 함께 했던 한 변호사의 가슴도 뭉클했을 것이다. 변호사 김용원씨(63)다. 그는 30년 전 형제복지원 사건의 담당 검사다. 하지만 기자에게는 검사보다 베스트셀러였던 <브레이크 없는 벤츠>, <천당에 간 판검사가 있을까>의 저자로 더 익숙하다. 기자는 2010년에 김 변호사를 처음 알았다. 이후 여러 차례 만나면서 그가 겪은 기막힌 스토리를 듣게 됐다. 그가 그 유명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담당 검사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변호사이자 만년 정치지망생이었다. 변호사로는 유능했지만 정치 운은 지지리도 없었다. 하필 그의 상대가 모두 강적이었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 법룰지원단에서 활약하기도 한 그는 선거 때마다 부산 영도 지역을 노크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정치거물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김형오 전 의장이 떠나자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그 자리를 버티고 앉았다. 기자가 보기에 그는 정치인의 특징인 능수능란함이나 친화력, 타협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스타일은 비리를 추적하는 검사가 딱 어울렸다.     
  
젊은 시절, 김용원 검사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했다. 날카로웠고, 기개가 대단했다. 그가 쓴 <브레이크없는 벤츠>는 선배 검사가 붙여준 자신의 별명을 제목으로 출간했다. 검사시절 그는 사건을 한번 맡으면 주저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너무 깊게 파헤치는 통에 선배검사나 윗선에서 수위 조절을 요구하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사건을 맡았다가 그는 중도에 수사를 그만두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거리에서 납치돼 시설에 갇힌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복지원에서 살해되거나 고문으로 사망해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원생수만 무려 513명이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의 대표적 인권침해 사건이자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린다.  
 
희대의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6년 당시 김 검사가 복지원 인근 야산에서 범죄현장을 발견한 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주임검사였던 그는 어느날 포수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형제복지원의 참상을 알게 된다. 이를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확보한  그는  1987년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복지원의 비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산 정관계 인사들로 수사망을 넓히자 외압을 받기에 이른다. 6월항쟁에 직면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전두환 정권은 사건을 빨리 덮기에 급급했다. 아니 오히려 두둔하기까지 했다.
<브레이크없는 벤츠>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5월 20일 대통령이 소년체전 참가차 부산에 오자 부산시장은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박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야. 박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하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검찰은 당시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을 비롯해 총무 김돈영, 사무장 주영운 등 5명을 불법감금 등의 혐의로 구속시키는데 그친다. 심각한 범죄였던 폭행, 살인, 시신유기, 시신암거래 혐의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단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박인근 원장은 1심에서 징역 10년과 벌금 6억여원을 선고받았지만 1989년 7월 정부(내무부)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며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횡령 혐의만 겨우 유죄로 인정됐다.
결국 박인근 원장은 겨우 2년만 복역하고 출소했다. 벌금도 내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은 이후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증거가 모두 사라졌다. 복지원 원생들과 그 가족들에겐 평생의 한이 남았다.  
 
문무일 총장은  27일 “당시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과 비리를 적발하여 수사를 진행했지만 검찰이 외압에 굴복해 수사를 조기에 종결하고 말았다는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면서 “기소한 사건마저도 재판 과정에서 관련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고 탄식하며 사과했다. 그 옆에 앉아있던 김용원 검사의 응어리진 한도 어느 정도 풀렸을까?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시 전도양양했던 김용원의 검사 인생에서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는 이를 잊지 않고 평생을 와신상담했다. 그리고 30년만에 검찰총장의 사과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론화시키는데 일조한 김용원 변호사의 그 집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하나, 지금도 젊은 시절 김용원 변호사의 별명인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포기하지 않고 비리를 파헤치는 젊은 검사들이 많았으면 한다. 아니 그런 브레이크없는 벤츠들이 지금도 전국 각지의 검찰청사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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