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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현장에서)맞수를 대하는 자세

2018-12-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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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정경부 기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 파일럿들은 도버해협을 피로 물들이며 처절하게 싸웠다. 그 와중에, 동화같은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영국 공군 소속 더글러스 베이더 중령은 전쟁 전 비행기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지만 군 수뇌부에 간청한 끝에 계속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치열한 본토항공전을 거쳐 26대의 독일기를 격추시킨 베이더는 1941년 8월, 프랑스 상공에서 격추당해 독일군 포로가 된다.
 
평소 그를 만나보고 싶어했던 독일 공군의 아돌프 갈란트 소령은 ‘나무의족을 단 영국공군 에이스’가 입원 중이던 병원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피아(彼我)를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독일 공군기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베이더의 요청을 받아들여 갈란트가 자신의 승용차를 내준 것은 약과였다. 격추 당시 달고있던 의족이 망가져 ‘새로운 영국제 의족을 가져다줬으면 좋겠다’는 베이더의 요청을 들은 갈란트는 그 내용을 영국군에 전했다. 부하들에게는 “의족을 싣고오는 영국기를 절대 공격하지 말라”는 엄명도 내렸다(영국 공군기는 베이더의 새 의족을 낙하산으로 투여한 후, 돌아가는 길에 활주로에 폭탄을 뿌리고 도망갔다).
 
중장까지 진급한 갈란트는 전쟁 후 전범 혐의로 체포된다. 이번에는 베이더가 도움을 준다. 조국에서 전쟁영웅이 된 베이더가 그의 무죄를 주장한데 힘입어 갈란트는 석방되고, 두 사람은 노년이 되어서도 우정을 나눴다. 결코 친해질 수 없을듯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킨 대표적인 예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애드윈 스탠턴은 틈만 나면 링컨을 비난하던 인물이었다. 외모비하는 물론이고,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가적 재난”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링컨은 대통령 취임 후 스탠턴을 전쟁장관에 임명한다. 스탠턴은 임명 초반 링컨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충실한 조언자가 된다. 링컨을 도와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는데도 많은 역할을 한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제일 슬퍼했던 사람이 다름아닌 스탠턴이었다. 그는 링컨의 시신을 옆에 두고 통곡하며 “여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는 말로 경의를 표한다.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영결식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부시 전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밥 돌 전 상원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그의 시신이 안치된 관에 다가갔다. 거동이 불편한 돌 전 의원은 수행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후, 가까스로 팔을 들어올려 거수경례를 했다. 친구이자 라이벌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모습에 많은 미국시민들이 감동했다.
 
사실 미국 정치도 우리만큼 혼란스럽지만 이런 장면에서만큼은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통령 혹은 상대당 정치인에 대해, 기본적인 예의는 온데간데 없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몇몇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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