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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감독 공판' 보도 유감

2018-12-18 20:21

조회수 :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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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기본적으로 원·피고 상호간의 치열한 투쟁이다. 재판장이 심판을 보기는 하지만 그에게 심증을 주기 위한 양측의 공방은 섬뜩할 정도로 피를 튀긴다. 그래서 "'소송의 스포츠화'를 경계하라"는 법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법조기자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취재가 바로 재판취재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말도 어렵지만, 원·피고의 주장이 모두 사실 같다. 목숨을 걸고 논리를 펴니 아니 그러기 어렵다. 그런 탓에 '더 정열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중도를 잃는 경우가 더러 있다. 취재를 망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쪽같은 몇시간과 바꾼 취재를 무조건 덮을 수는 없다. 그래서 법조기자들, 특히 재판에 들어가는 말진들이 기계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풀워딩'이다. 법정 내 모든 소리와 장면을 기계적으로 적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그것을 보고 뺄 것은 빼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을 수 있다. 물론 이것 조차 안 되면 그 기사는 '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팀장이나 선배들은 '워딩만 봐도 내가 법정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죄다 적어야 한다"고 담당기자들을 때마다 을러댄다. 신기하게도 후배 중 유능한 기자는 방청석에서 들리는 한숨소리나 주요 당사자가 울먹인 때와 횟수, 심지어 돌발적으로 울렸다 꺼지는 휴대전화 벨 음악 제목이 뭔지를 적어오기도 한다. 독한 선배를 층층시하로 두고 있는 말진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풀워딩을 서로 맞춰보는 지혜도 발휘한다.  
 
사설이 길었지만, 서로의 주장이 상반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양쪽 주장을 똑같이 보도하는 것이 기사 쓰기의 기본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나오고 있는 재판기사를 비롯한 몇몇 사건보도는 매우 유감이다. 특히 어제(12월17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감독 조재범씨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그렇다. 조씨는 제자 심석희 선수 등에 대한 상습폭행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필자가 직접 재판을 방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알 수 없다. 오롯이 이 재판을 다룬 기사들로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 기사의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손가락이 부러져, 맞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뇌진탕으로 올림픽 금 좌절”, “밀어주는 다른 A선수 평창경기장에서 몰래 코치”, “일부러 장비교체 날 훼손”, "너 생리하냐"… 기사 본문도 같다.
 
기사의 제목과 리드의 결정은 현장 취재기자 몫이다. 누구더라도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데스크 조차도 수정이 불가피할 때엔 현장 취재기자와 토론해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판을 보도한 대부분의 기사들 정도면 현장은 신성한 법정이 아니라 차라리 죄수를 향해 군중들이 돌을 던지는 교수형장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단적인 예로, 조씨 측 증인으로 전 대표팀 트레이너가 이날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는데 그의 진술은 대부분의 기사에서 찾기 어렵다.
 
이 재판을 보도(네이버뉴스)한 기사는 18일 오후 8시 기준으로 총 42꼭지다. 전 트레이너의 반대진술을 다룬 기사는 이 중 파이낸셜뉴스와 뉴시스 둘 뿐이다. 그나마 제목이나 전체적인 면에서 균형을 맞춘 기사는 파이낸셜뉴스 최재성 기자의 기사 한꼭지 뿐이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4145815)
 
김성룡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가 쓴 논문 “대중매체를 통한 범죄혐의 보도와 형사사법”(형사정책연구 2014-겨울호, 8쪽 이하)을 보면, 독일 법관과 검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설문에서 자신이 담당한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를 확인한다고 답한 사람이 60%를 넘는다. 또 그 비슷한 비율의 법관과 검사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의식한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법관과 검사들을 대상으로 이와 똑같은 조사를 한 논문은 아직 본적이 없으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형사 피해자의 법정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의 무게도 그 못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조씨는 이번 첫 공판에서 이미 유죄판결이 확정된 듯 보인다. 적어도 이같이 기본을 무시한 소요적 기사를 인터넷에서, 신문에서, 방송에서 무차별적으로 주입 받은 대중들에게는 그렇다. 
 
판결은 법관이 내리는 것이다. 그 전까지 당사자의 주장은 공평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것을 잊은 언론은 그야말로 펜대 뒤에 숨은 야만이다. 
 
그 책임은 반드시 돌아오고, 피할 수 없다.
 
쇼트트랙 선수 심석희가 지난 17일 오후 경기 수원지방법원에서 선수들을 상습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재판에 증인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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