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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고르

양자역학

2019-06-1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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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이란 무엇일까? 물리학의 두 기둥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은 '상대적으로 이용'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실생활에 적용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어렵다. 실생활과 관련이 없다. 양자도 어려운데 거기에 역학이라니.
 
상대성 이론은 '중력'이란 없다고 말한다. 뉴턴이 말한 중력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이 휘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당기는 힘이란 없다. 공간이 휘어져서 생기는 현상이라는게 아인슈타인의 설명이다. 사실 놀라운 이론은 아니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인력'이라고 표현했다. 인력은 모든 물질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습성이다. 사과는 물과 흙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본래 고향인 땅으로 돌아가려고 떨어진다고 믿었다. 그것을 인력이라 불렀다. 사과가 고향으로 가려는 인력. 이 가설은 1500년이나 믿어져 왔다. 이후 만유인력의 법칙을 뉴턴이 창안했다. 지구 중심부가 당기는 힘이라는 것. 다음에 아인슈타인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부정하고 '시공간이 휘어져서 생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은 이렇다. 인력이나 만유인력이나 시공간이 휘어진 현상이나 모두 증명이 불가능하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패러다임'으로 규정할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물질의 습성. 지구 중심부가 끌어당기는 힘. 시공간이 휘어진 현상 모두 우리가 지각하는 패러다임에서 존재한다. 위에서 아래로 물질이 왜 떨어지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것이 없다. 
 
2019년 현재까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바로 시공간이 휘어졌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그러면 양자역학은 어떤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빛에 관한 것이다. 빛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고 변하는 이론이다. 양자역학은 애매하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 그렇다고 신뢰하기 쉽지는 않다. 양자역학을 알기 위해서는 빛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빛은 물질이다. 모든 물질은 빛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빛이 물질에 닿으면 반사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다. 색깔도 마찬가지다. 빛이 없다면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초록색 병은 왜 초록색일까? 원래 색깔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닿음으로써 초록색이 발현된다. 물건을 만지는 것도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각적인 것 뿐 아니라 촉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청각적인 것. 모두 빛이 있어 가능하다. 그래서 빛은 물질이고 물질은 곧 빛이 된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모든 물질은 원자가 있다. 원자안에는 핵과 전자가 있다. 전자는 핵 주위를 돈다. 핵과 전자 사이에는 빈공간이 존재한다. 그래서 전자가 핵 주위를 돌 수 있다. 전자는 밀어내는 힘이 있다. 같은 극끼리는 민다. 반대는 잡아당긴다. 모든 물질은 원자 속의 핵과 전자로 인해 밀고 당기는 힘이 생긴다. 모든 힘은 여기서 시작된다. 바로 전자의 밀고 당기는 힘. 전기, 전류, 수력, 원자력, 화력 등 모든 에너지는 전자의 힘이다. 
 
빛의 속도는 어떤가? 1초에 10만킬로미터를 간다. 전류는 어떤가? 속도가 같다. 자기장도 마찬가지다. 전기, 전류, 전자, 빛 모두 속도가 같다. 우리는 이 속도에 길들여져 있다. 이 속도는 우주의 속도다. 보고 만지고 느끼는 속도가 빛=전기=전류=전자의 속도와 일치한다. 뇌속에 흐르는 미세한 전류. 마찬가지로 빛의 속도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쪼개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물질이라 쪼개진다. 그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다. 우리의 신체활동도 전자의 활동인 것이다. 수천억개의 전자와 핵이 뭉쳐진 세포덩어리다. 인간을 이루는 물질은 결국 원자다. 그말은 곧 핵과 전자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인간은 전자로 이뤄졌다. 전자의 힘으로 활동한다. 
 
전자는 '최적화'를 이루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상황에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최적화를 위해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합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인 사람은 없다. 모두 전자의 최적화 활동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전자'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사실상 없다는 유물론 입장을 대변할 뿐이다. 우리가 가지는 생각과 상념, 느낌, 신념, 관념은 일종의 '스크린 장막위에 펼쳐진 착각'이라는 말밖에 안된다. 이런 식이면 대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누가 통제하는가'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나를 통제하는 것이 정신이 아닌 물질이라는 의미다. 결국 전자 덩어리들의 결합체가 '내 몸을 움직이는 주체'라는 결론이 나온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양자역학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따지고 보면 기계들이 만든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영화 '매트릭스'와 다를바가 없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감각은 믿을 수 없다". 그것은 간단하다. 모든 감각의 정보는 뇌의 전기신호이기 때문이다. 전자들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다.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한여름밤의 달콤한 꿈인 것이다. 
 
13. 세상의 안쪽과 바깥쪽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선과 악도 있다. 있음과 없음이 있다. 음과 양이 존재한다. 세상은 이원화 돼있다. 세상도 두가지로 구성된다. 안쪽과 바깥쪽이다. 안쪽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 바깥쪽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귀신은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할까? 귀신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투명한 것?', '영혼?', '둥둥 떠다니는 것?'. 그럼 영혼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까. 불가능하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앙도 그렇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어떤가. 사랑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말 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럼 이를 구분해보자. 
 
귀신은 없다. 영혼도 없다. 신은 있다. 신은 어떤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Unmoved mover. 최초의 원인이 되는 것이 신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했다. 그러면 빅뱅을 유발한 것이 신이다. 신은 실체를 아직 모른다. 다만 언어로 표현할 수는 있다.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정신적인 감정은 아니다.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소유욕, 소비욕 등과 같은 욕망이다. 욕망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성애는 욕망인가? 남녀간 욕망과 다른 형태의 욕망이다. 자식을 낳는 것은 계속 살아가려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 또한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세상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헛소리가 있다. 헛소리는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모르고 표현하는 것이다. 혹은 말할 수 있는 것도 헷갈려서 하는 말이다. 헛소리는 '유실된 언어'다. 길을 잃은 언어다. 세상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두가지로 구분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말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를 통해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언어게임을 통해 추상화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 말 할 수 없는 것은 감각밖의 영역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있다. 형이상학, 논리학, 철학, 수학, 윤리학 등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왜 혼란스러울까. 바로 언어가 왜곡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이 말장난 처럼 들리는 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꿀통에 빠진 파리같다. 
 
예를 들어보자. 헤겔의 언어다.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이며 현실화인 전체적인 단계의 것이다. 참다운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 다시 도의태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 간다'. 
 
무슨 말인가. 말장난 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꿀통에 빠진 파리처럼 혼자 도취된 언어다. 이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린다. 
 
철학자, 형이상학자, 윤리학자, 신학자들이 파리신세다. 자기들만의 언어유희에 빠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쉽게 정확히 해야 한다. 꿀통 속의 달콤한 냄새를 없애야 한다. 미사여구를 빼고 논리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참모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럼 말할 수 있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돼 있나. 그리고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나. 알아보자. 우리는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 글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통해 이미지를 떠올린다. 문자와 글자 자체로 대상을 알 수는 없다. 문자와 글자는 일종의 신호다. 이 신호를 통해 대상을 머릿속에서 '이미지'화 한다. 언어를 소통하면서 머리안에서는 그림을 그려 생각하는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 자체는 뜻이 없다. 'ㅅㅏㄱㅗㅏ'라는 기호를 합쳐서 보여주면 '먹을 수 있는 빨간 씨방'이라고 생각을 한다. 사과 자체는 의미가 없다. 사과라는 문자를 통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면 인간은 소통한다. 언어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는 동일하다. 중간에 '이미지'가 주역할이다. 
 
대상은 그렇다쳐도 진리는 어떻게 소통할까?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논리문제다. 이것은 '진리함수이론'이다. 진리값을 구분하기 위한 함수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인식할까? 먼저 대상에는 이름이 있다. 대상은 이름을 통해 '사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벽이라는 이름과 파랗다는 이름이 합쳐져 '벽은 파랗다'라는 사태를 만든다. 단순히 '벽', '파랗다'는 세상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안된다. 
 
사태는 '벽이 파랗다'라는 요소명제를 낳는다. 이 사태는 사실로 나타난다. '사격형액자가 파란색 벽에 걸여있다'라는 식이다. 이는 복합명제로 발전한다. 이렇게 세계는 단어에서 사태, 사실로써 언어로 표현된다. 세계는 사실들로 구성돼 있다. 이 사실들은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다. 언어는 세계다. 세계는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다.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는 안쪽이다. 우리의 의식을 의미한다. 
 
사태는 가능한 것. 사실은 실제적인 것을 의미한다. 모두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다.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은 세계다. 그 세계는 언어로 말할 수 있으며 세계의 안쪽, 의식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림을 보자. 고흐 '아를의 침실'.
 
 
침실에는 액자가 있다. 벽도 있다. 파란색도 보인다. 이것들은 대상이다. 대상은 '사각형 액자'라는 사태를 보인다. 벽은 그냥 벽이 아니다. 존재는 '파란색 벽'이다. 벽은 파랗다라는 요소명제인 사태다. 침대와 탁자, 벽, 액자. 이것들을 합쳐도 방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순한 '지시'다. 침대가 존재한다. 탁자가 존재한다는 사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 요소명제들이 사태를 표현한다. .사태들이 모인 사실. 그래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다.
 
진리함수이론. 요소명제인 사태와 일치하면 참. 복합명제는 요소명제의 논리선이다. 진리값은 총 16가지로 나눠진다. 항상 진리인 것은 항진명제(Tautology)라고 한다. 항상 거짓인 것은 항위명제(Contradicton)라고 부른다. 이 두가지 영역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다룬다. 
 
하지만 세상은 진리값에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사태와 사실들의 진리함수로 이뤄진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 말할 수 없는 것은 항진명제와 항위명제를 다루는 수학과 논리학, 윤리학, 철학 등이다.
 
예를 들어보자. '착하다는 좋다'라는 명제가 있다. 이것은 참인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도 있다. 악행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착하다는 좋다'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리고 누구나 악행을 저질러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착하다는 좋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무너진다. 
 
고로 착한것과 좋은 것은 대응하는 사태가 없다. 결국 '착하다는 좋다'는 헛소리가 된다. 넌센스다. 미학, 철학, 윤리학, 형이상학도 이런 식이면 다 헛소리가 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윤리, 도덕을 다루는 미학, 철학, 윤리학이 넌센스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알기가 어렵고 언어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주의 원리가 의미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직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과학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검증불가능하는 것은 필요없다는 의미다. 그들은 오직 과학만이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형이상학, 윤리학은 헛소리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비과학적인 영역이 헛소리라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박애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상은 이름이 있고 사태를 일으킨다. 사태의 총합은 사실이다. 사실로 세계는 구성됐다. 고로 언어로 사실을 말할 수 있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넌센스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밖'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안쪽은 과학, 세계의 바깥쪽은 수학, 논리, 종교, 예술, 형이상학이라고 보면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게임'과 실천적 사유로 구체화 된다. 
 
결론은 이렇다. 세계는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세계 밖의 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어설프게 알면 헛소리가 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철학적탐구>
 
12. 상상력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 상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은 추상력이다. 추상해서 구체화시키는 능력은 중요하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시각, 후각, 청각 등 감각으로 인한 경험은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감각을 넘어 본질을 정확히 보려면 추상력이 필요하다. 
 
과거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사람들은 세균의 정체를 몰랐다. 페스트의 원인을 '악마'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악마에게 살해 당했다고 생각했다. 혹은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느낀 것이다. 파스퇴르는 궁금했다. 악마의 정체를 보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를 알아내기 위해 그는 현미경을 개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 현미경을 만들어 시료를 관찰했다. 파스퇴르는 그것이 악마가 아닌 '세균'임을 알아낸다. 
 
이로 인해 페스트는 정복이 됐다. 악마라고 믿던 무지함을 깬 것이다. 세균의 정체를 밝혀내면서 흑사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파스퇴르는 현미경을 어떻게 발명했을까. 보이지 않는 세균을 보겠다는 상상력에 기인한다. 상상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다. 모두가 일관되게 '악마의 저주'라고 생각할때 파스퇴르는 다른 것을 생각한 것이다. 추상력이다. 
 
아이디어는 이렇게 다르게 보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상력은 어디에서 출발할까?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에서 인간은 상상하는 능력을 키운다.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다. "IT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모든 것은 상상력에서 시작한다. 특히 4차산업혁명은 상상력의 장이다.
 
11. 기획은 설득
 
기획은 설득을 하는 작업이다.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작업이다. 설득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다. 잘 준비된 사람은 설득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설득을 하고 있다. 이말은 누구나 생활속에서 항상 '기획'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방법. 그것이 기획의 왕도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자. 이것이 기획의 목적이다. 그리고 실행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을 없애는 것.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설득이 된다. 
 
연애를 할때는 어땠는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략을 짠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기 위해서도 생각을 한다. 이것이 하나의 기획이다. 기획은 이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기획을 해왔다. 좀 더 확실하고 디테일하며 설득력있게 준비하는 것. 이것이 기획이다. 
 
기획은 상대방이 궁금해 하는 점이 목차가 돼야 한다. 두괄식으로 정리해야 한다. 
 
두괄식은 무엇인가. 결론이 처음에 나온다. 그다음 이유가 등장한다. 다음이 사례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행할 수 있는 과정을 제시한다. 
 
상대방에게 제안을 할때는 어떤가? 현재 문제를 파악한다.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은 어떻게 진행할 지 계획을 나열한다. 예상되는 성과와 기대효과를 알려준다. 
 
한 여직원이 남자상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예를 들자. 그러면 어떤 기획을 해서 제안을 할 수 있을까?
 
제안을 할때는 먼제 문제를 파악하라.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라. 어떻게 진행할 지 계획을 말해주라. 그리고 예상성과와 기대효과를 알려준다. 
 
이렇게 제안해보자.
 
"요즘 힘드니"
"응. 힘들어"
"회사일이 많니?"
"너무 짜증나고 힘들어"
"왜 누가 괴롭게 해?"
"상사 때문이지 뭐겠니"
"너는 얼굴도 예쁘고 일도 잘하는데 이거 하나만 갖추면 완벽해질거야"
"응? 뭔데?"
"남자들의 승부세계"
"남자들의 승부세계? 그게 뭔데?"
"남자들은 승부에 목숨을 걸지. 직장생활도 그렇거든. 그걸 알면 너가 골치아퍼하는 상사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어"
"그렇구나. 나 알려줘"
 
이렇게 해서 남과 여는 야구장에 간다. 주목적은 남자들의 승부세계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목적은 남자가 여자와 야구장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목적이 뭐든 남자들의 승부세계는 야구에서 보인다. 이른바 비교우의의 해결책을 야구경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야구경기를 보러가도록 제안을 하는 기획. 그냥 '야구나 보러가자'고 하면 아무도 안따라온다. 기획은 이렇게 상대방이 행동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작업이다.
 
흔히 우리는 기획을 할때 파워포인트부터 연다. 아니다. 파워포인트는 핵심적인 것을 옮기는 작업이다. 그래서 메모장이나 워드, 한글파일에서 기획을 해야 한다. 파워포인트에는 핵심만 써야 한다.
 
기획에서 백지의 공포는 누구나 느낀다. 글을 아주 잘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다. 그래서 기획서에는 공식을 넣어야 한다. 뼈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먼저 동기부여, 아이스브레이킹, 말걸기다. 그다음 기획을 만드는 자기소개가 필요하다. 다음은 시장상황, 아이디어 제시, 정성적-정량적 목표제시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누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은 Appendix로 이 프로젝트를 위한 백데이터를 제시한다.
 
10. 생명
 
 생명에도 소리가 있을까? 생명의 소리는 무엇일까? 단순히 말하고 듣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생명의 소리. 소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소리란 무엇일까? 생명의 소리는 어디서 나올까? 그러면 생명의 소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생명은 아름다움이다. 예쁨과 아름다움은 다르다. 예쁨은 사라지는 것.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영원한 것에 집착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사라지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사라지지 않는 것을 잡아두려는 본능이 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답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잘생긴 남자. 아름다운 여자. 수려한 자연. 측은지심. 이런 것들이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낄까? 보이는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모든 물질에는 세포가 있듯이 아름다움에도 원형이 있다. 아름다움의 본질.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그 원형을 들여다 보자.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삶의 아름다움은 휴식에 있다. 일을 하는 이유는 잘 쉬려는 것이다. 잘 쉬어야 아름다움이 보인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빨리 쉬기 위해서다. 더 많이 놀기 위해서다. 편안하고 여유있게 놀려고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한다. 일이 목적이 아니다. 일은 수단이다. 빨리 일하고 많이 놀려고 일을 한다. 그래서 일은 놀이가 돼야 한다. 놀이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일과 놀이는 하나다. 놀면서 일해야 한다. 일하면서 놀아야 한다. 삶이 윤택해지고 편안해지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피사로의 풀밭에서의 휴식>
 
9.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신을 넘어선 사람. 사람을 넘어선 사람. 그 사람은 초인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믿고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은 삶. 신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며 삶을 개척하는 사람. 
 
사람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지구위 동물중에서 태어나 스스로 걷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다른 동물들은 반나절안에 서서 걷는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사람은 몇년동안 부모에 의지한다.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 모두 의존한다. 세상에 내던져저 보호받으며 크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래서 사람은 성장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렇게 길들여진 인간. 교육으로 피동적인 삶이 결정된다. 주체적인 삶을 끌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 결국 스스로를 통제하고 일으켜야 한다. 태어나서부터 수동적인 인간. 살아가면서 스스로 일어서는 능동적 인간. 사람은 초인으로 성장해 나간다.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니체가 했다. 그는 신 중심의 근대철학을 종결했다. 그리고 현대철학을 열었다. 망치를 든 철학자. '신은 죽었다'라고 혁명적 주장을 한다. 
 
 
그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니체. 1849년 5살에 아버지가 뇌연화증으로 사망한다. 동생 루드비히 요셉은 1850년에 세상을 떠난다. 태어나서 몸도 안좋고 가족도 잃었다. 그럼에도 평범하게 산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과를 진학한다. 하지만 흥미를 잃고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한다.
 
그는 몸이 안좋아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원한다. 결국 말에서 떨어져 가슴부상을 당한다. 당시 23살이다. 부상으로 결국 학업에 매진한다. 25세에 박사논문 없이 저술만으로 바젤대학교에서 교수를 한다. 
 
이때 나온 책들이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다. 35살에 건강악화로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유럽각지를 돌며 집필 생활을 한다.
 
그는 45살에 이탈리아에서 졸도한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해 마지막 10년을 그곳에서 보낸다. 정신발작을 일으키며 56살이 되는 해 1900 8월25일에 사망한다. 니체의 삶은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비극이다. 보통 회의주의적이거나 슬픔삶을 살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 사상으로 헤쳐나간다. 스스로 가치를 만드는 삶. 초인사상이다. 스스로 결정해 세상과 맞서는 것. 신에 의존하지 않는 삶.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는 당대에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받는다. 하지만 그는 근대 철학을 종결시켰다. 그가 구축한 현대철학. 초인사상은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이 아닐까?
 
'신은 죽었다. 스스로 결정하라'
-니체
 
8. 도주 
 
 사회는 개인을 옭아맨다. 자본의 시스템으로 편입시킨다.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해방시킨다. 하지만 종속의 시스템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전체주의는 북한처럼 정치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1인 독재. 욕망과 권력의 편집증이다. 
 
파시즘은 전체주의와 조금 다르다. 1인 독재체제이지만 개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독재자로 만든다. 내부의 파시즘이다. 내부의 파시즘은 전체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이른바 '우리안의 파시즘'이다. 대중독재. 선전과 선동을 통한 대중독재의 힘은 무엇일까? 히틀러와 괴벨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선동은 시민의 '성적욕구를 만족'시켜준다. 단순한 성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처럼 삶에 대한 욕구와 의지를 자극하는 생명적인 '성적욕구'. 이를 자극한다. 파시즘의 원천은 리비도다. 
 
이는 자본으로 연결된다. 노동가치는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등가성으로 소멸한다. 자유를 표방하는 새로운 억압. 자본은 파시즘과 형제다. 이는 끊임없는 분열증과 편집증을 일으킨다. 자본은 욕망의 해방을 선물한다. 개인은 분열증으로 억압에서 탈피한다. 하지만 다시 자본에 끌려들어온다. 편집증을 일으킨다. 분열과 편집증을 반복적으로 느끼는 사람. 결국 허탈함으로 가득하다. 
 
만약 자본주의가 이런 분열과 편집증을 반복해 극한으로 가면 대안이 나올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많은 철학자들은 원인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른바 '수목형 사고'다. 하지만 반드시 원인을 찾아 규명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사고는 되레 부작용을 낳았다. 세계대전도 이런 배경에서 발생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들뢰즈가 답한다. '리좀'. 뿌리와 줄기가 구분되지 않는 '뿌리 줄기식 사고'. 다양성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을 찾지 말라. 줄기가 뻗어 뿌리가 된 뿌리줄기식물처럼 다양성의 방식으로 바라보야 한다. 즉 자본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속박이 동시에 작용한다. 
 
자본주의로 인한 현상을 살펴보자. 경직, 유연, 탈주 현상이 나타난다. 자본으로부터 탈주는 노마디즘이다. 경직은 제도와 법칙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유연은 경직과 탈주사이에서 동요하는 현상이다. 
 
그대가 이 시대에 탈진하고 허탈해 한다면 '순순히 따를 것인가'라는 경직과 '자본으로부터 도주할 것인가'라는 노마디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그대를 흔들어놓고 탈탈 턴다. 혼도 주머니도 다 뺏는다. 그리고 다시 채워넣는다. 기존보다 더 적게. 욕망을 해방시키고 다시 욕망에 춤추는 본인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허탈함이다. 
 
자본에 경직적인 자세는 '자본을 신으로 믿는 현상'이다. 그리고 복종을 한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해방된 욕망에 춤을 추는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다. 
 
유연한 자세. 이는 패닉상태다. 말 그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자본의 롤러코스터에 다시 올라탈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판단하지 못한다. 이는 결국 끌려가게 돼있다. 
 
탈주는 노마디즘이다. 자본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가지 현상이 있다. 미시적 파시즘으로 변질되거나 완전한 노마디즘으로 도주하거나. 앞서 파시즘은 미시적 독재라고 정의했다. 노마디즘은 자칫 미시적 독재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도주하려다 자신만의 파시즘적 영토에 갇힌다. 
 
미디어의 역할을 보자. 시민의 욕망을 분출시켜 자본주의에 포획시킨다. 파시즘의 충실한 종이다. 미디어는 노마디즘에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이들에게 탈주, 도주는 해방이 아니다. 해방과 동시에 예속된다. 
 
그렇다면 노마디즘은 어떻게 진행되야 하는가. 이주가 아니어야 한다. 유목민처럼 목적지가 없는 자본으로부터의 '도주'가 돼야 한다. 이는 단순히 '탈출'로 인한 '정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미디어 같은 자본의 올가미는 항상 그대를 노린다. 고로 노마디즘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의 주체가 돼야 한다. 욕망의 본질에 근거해 저항해야 한다. 
 
결국 변화하는 노마디즘이 탈주에 성공한다. 능력자가 탈주한다. 자본주의 변혁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이 논리에도 헛점이 생긴다. 
 
첫번째, 욕망은 무의식으로 생긴다. 그런데 탈주는 결국 의식적인 행위다. 
 
두번째, 자본주의의 분열. 이로 인해 욕망이 해방된다. 하지만 혁명적 해방이 반동적 해방보다 좋다는 근거가 없다. 흔히 "재미없는 사회주의보다 즐길 것이 많은 자본주의가 낫다"라는 논리다. 
 
명분만 가득한 해방보다 배부른 욕망충족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욕망의 통제와 탈주. 이로 인해 욕망의 위계가 사라질 수 있다. 욕망의 기준이 흔들린다. 결국 무리한 탈주는 회의주의와 혼란으로 가득하다. 자본을 탈주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탈주하는지 혼동이 된다. 단순한 '욕망해방'이 무엇을 위한 해방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데아'적인 욕망해방을 원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허탈함. 이런 이유로 자본에 예속된 인간은 허털함을 느낀다. 탈주할 수도 없다. 도주해도 얻을 것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자본에 편입된다. 자본은 이렇게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둔다. 스스로 도망치기를 포기하게끔 아름다운 유혹을 뿌린다. 자본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은근히 진행되기 때문에 벗어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자본은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킨다. 노마디즘. 숲을 떠난 원숭이.
 
<영화 '아포칼립토'>
 
7. 파시즘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파시즘이 유행했다. 전체주의. 그것은 악몽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파시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본은 권력처럼 파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다르다. 자본의 파시즘은 '자기착취'를 기반으로 한다. 
 
파시즘은 왜 생기는가. 권력의 파시즘이든 자기착취의 파시즘이든. 그것은 많은 이유가 있다. 
 
먼저 대중이 무지해서다. 두번째는 억압된 성욕이 왜곡된 권력욕으로 나타난다는 주장도 있다. 성욕과 관련한 것은 라이히라는 철학자가 주장한다. 
 
어쨌거나 욕구와 욕망은 권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은 욕구와 욕망에 불을 붙인다. 이는 권력에 대한 의지와 욕구로 발현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욕망의 발현을 '양태론'이라 정의한다. 형채를 알 수 없지만 욕망은 권력의지로 나타난다. 
 
 
본질은 하나다. 욕망의 모습이다. 이는 파시즘으로 나타난다. 다른 형태일 뿐 모두 같은 형태의 욕망이다. 욕망은 리비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적인 에너지다. 그래서 분열적이고 편집증적인 성격을 보인다. 욕망은 리비도와 같다. 보이지 않는 성적인 욕구와 같은 형태다. 리비도 처럼 무의식적인 에너지다. 
 
욕망이 대중에 작용한다면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분자적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계급에 작용한다면 편집증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몰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욕망은 본질이 동일하다. 
 
파시즘은 권력에 대한 욕구. 그리고 자본도 이와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각 대중에게 파생되는 자본의 욕구는 개인들의 내적인 파시즘을 일으킨다. 자기 착취, 자기 소비가 일어난다. 계급에 작용하면 계급간 착취, 계급간 파시즘적인 형태로 변질된다. 
 
이런 현상은 정치권에서 혼선을 보이기도 한다. 자유한국당을 보라. 지지자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이다. 진보라고 자칭하는 더불어민주당을 보자.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 지지한다. 자본의 파시즘적인 욕망은 분열되고 편집증적으로 모양을 바꾼다. 욕망과 뒤엉켜 정치와 경제노선을 뒤죽박죽 만들기도 한다. 정책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돈 부채질에 환심이 춤을 춘다. 파시즘의 유령은 전체주의 사상에서 자본주의로 옮아간다. 춤추는 욕망앞에서 대중과 계급간 분열과 편집증적인 현상이 뒤섞인다. 자본은 파시즘의 DNA를 가지고 있다.
 
6. 동시에 일어난 일
 
 가끔 처음 가본 곳이 익숙할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났는데 낯이 익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과거에 가봤거나 언젠가 만났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임에도 익숙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런 현상은 여러가지로 설명된다. 
 
첫번째 데자뷔 현상. 이는 기시감이라고 하는데 일상이 반복되면 이런 현상을 경험한다. 두번째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기억력의 문제다. 세번째 동시성의 원리다. 이는 실제로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데자뷔와 기억력의 문제는 물리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동시성의 원리는 성격이 다르다. 꿈에서 만약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꿈을 꾼다. 그런데 그날 정말 할아버지가 사망하셨다. 동시성 현상이다.
 
이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 부분을 연구하는 것은 호불호가 갈린다. 신비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보통 '오컬트'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 꿈과 할아버지의 사망이 동시적으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다. 동시성은 사이비인가. 하지만 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이를 지지한다. 데이비드 봄과 파올리가 대표적이다. 
 
 
실제 '스웨덴 보그'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철학, 과학, 수학 등 각종 학문에 통달했다. 그는 종교적인 현상을 믿지 않았다. 그는 104살까지 살면서 노년에 이런 책을 쓴다. '나는 영계를 보았다'. 자신이 직접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것을 책을 펴낸 것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어렵다. 앞뒤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세부적이고 체계적이다. 앞뒤가 인과성이 뚜렷하다. 특히 과학자, 철학자인 그가 세밀하게 영적인 세계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실제 이 책은 '신비주의' 과학사상의 모태가 된다. 
 
스웨덴 보그의 신비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 위의 데이비드 봄이라는 미국 과학자 그리고 심리분석가 칼 융이다. 융은 인과관계가 없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정신과 물질이 연관돼 발생한다는 것이다. 
 
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융은 어느날 환자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환자는 황금색 풍뎅이 모양의 보석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진료소 창문에 황금색 풍뎅이가 보였다. 융은 그 풍뎅이를 잡아다 환자에게 줬다. 이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인과관계다. 
 
스웨덴 보그라는 과학자는 천국과 지옥을 마음대로 다녔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국은 빛이고 지옥은 어둠이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이 아니다. 영원한 빛과 영원한 어둠. 영혼은 그곳을 드나든다고 한다. 또 보그는 천리밖을 내다본다고 한다. 하루는 겟덴보그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는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화재를 보았다고 한다. 그가 그 자리에서 그 현장을 묘사하니 실제로 정확했다고 한다. 
 
스웨덴 보그는 실제 문학가, 과학자, 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실제 그의 능력을 옆에서 보았고 파우스트는 스웨덴 보그를 모델로 해 지은 책이다. 칸트 또한 마찬가지다. 
 
동시성.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융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인과관계의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은 인과관계로 이뤄진다.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있다. 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신적인 요소는 시간과 공간적 제약이 없다. 그래서 융은 황금풍뎅이를 꿈에서 본 환자의 정신은 무의식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의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명료하게 본다. 하지만 일부만 본다. 무의식은 명료하지 않지만 현상을 전체적으로 본다. 융의 결론은 이렇다. 
 
'무의식이 의식에게 꿈이라는 언어로 신호를 보낸다'.
'무의식적인 정신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동시적으로 인과관계를 갖고 발생한다'.
 
그렇다면 실제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할까? 현대과학에서는 이를 입증했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에서 산다. 아인슈타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의 모습은 원뿔처럼 생겼다. 그 공간과 시간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민코프스키의 시공간'이라는 원뿔 형태로 실험이 진행된다. 
 
우리는 3차원 공간, 1차원 시간에서 활동하기에 반드시 원뿔처럼 생긴 곳 안에서만 현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물질이 아니다. 그래서 4차원을 넘나든다. 이렇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무의식끼리 만나서 충돌해 사건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빛은 어떨까? 빛을 통해 3차원과 4차원의 관계를 살펴보자. 빛은 입자와 파동이다.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특하다. 입자이기도 하면서 파동이기도 하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물질은 입자이거나 또는 파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빛은 그렇지 않다. 
 
먼저 빛을 보면 간섭모양이 나온다. 빛이 실험기구를 통과하면 전자라서 입자인데 왜 간선무늬가 생길까? 전자가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빛이 유일하다. 하지만 빛의 전자 하나가 2개 구멍을 통과하는 실험을 한다면 달라진다. 감지기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변한다. 감지기로 전자를 관찰하면 파동형태다. 감지기로 관찰될 때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감지기로 빛을 관찰할 때는 빛이 어느 구멍으로 통과할지가 결정된다. 
 
이를 중첩상태라고 한다. 입자이기도 하고 파장이기도 한 것. 겹쳐지는 현상. 양자역학에 대한 보어의 해석. 흔히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EPR사고 실험이라고 한 것을 데이비드 봄이 단순화 시켰다.
 
하지만 논란이 있다. 입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관찰하지 않으면 중첩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거리가 100만 광년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는 두개의 입자. 그런데 이 두개의 입자를 관찰하면 서로 반대방향이 결정된다. 허나 A가 결정되면 B는 100만광년 뒤에 결정된다. 관찰하지 않으면 중첩되는 것이 관찰한 순간 100만광년 뒤의 것이 결정된다. 놀랍다.
 
데이비드 봄의 결론은 이렇다. 

'시공간적으로 100만광년 떨어져 있다고 해도 다른 차원에서 보면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입자만 그럴까? 모든 물질이 연결돼있다. 
 
그럼 이런 예를 들어보자.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 보자. 파도의 파동이 중첩된다. 파동 하나를 떼어내서 볼 수 있을까? 파동만 떼어내서 볼 수 없다. 파동은 모두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고로 우주의 모습도 그렇다. 물질이 이처럼 연결돼 있어 하나하나 떼어내 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주의 물질이 따로 분리된 것처럼 보일까? 그것이 의식의 한계다. 의식이 그것만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일부만 본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연결돼 있다. 그것도 질서를 가지고 연결돼있다. 인간의 의식이 모르는 또 다른 질서가 있는 것이다.
 
우주는 숨겨진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데이비드 봄의 결론이다. 고로 우주의 물질 각각은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 홀로그램 우주이론이라고 한다.
 
한가지 놀라운 실험을 해보자. 유리통에 글리세린 넣어보자. 그리고 잉크방울 넣자. 그리고 돌린다. 서로 잉크가 섞인다. 어떻게 섞이는지 알 수 있을까? 질서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반대로 돌려보자. 원래 잉크모양으로 분리된다. 마치 비디오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이는 분자 사이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질서가 있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우주도 숨겨진 질서가 있다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럼 위에서 언급한 융의 황금색 풍뎅이는 실제 인과관계를 가지고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아무 관련 없는 두개 사건이 연관있는 것처럼 동시에 경험하는 동시성 현상. 이는 우연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의 시간에서 산다. 무의식은 4차원을 넘나든다. 그럼 다른 차원에서 보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다. 단순한 시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이 홀로그램 우주이론 사이비 과학이라는 말도 있다. 판단은 각자가 해야 한다. 근거도 있지만 근거가 없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의식의 한계다. 
 
칸트는 처음 스웨덴 보그의 '천국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유령을 보는 사람의 꿈'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그리고 스웨덴 보그를 "정신병원 입원 대기자"라고 폄하했다. 
 
이 신비사상은 과학인가 판타지인가.
 
5. 별
 
별이 빛나는 밤. 영롱하게 별이 빛난다. 그림에서 주인공은 별이다. 별이 빛나고 돌고 있다. 달도 보인다. 궁금한 것은 가운데 왼쪽 나무줄기 처럼 길게 뻗은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불기둥이라고 한다. 고흐는 무엇을 보고 아름다운 밤하늘아래 불기둥을 그렸을까? 이유는 모른다. 아름다운 별빛 아래 풍경과 불기둥이 대조된다. 눈부신 세상.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가까이 들여다보라. 고통도 같이 존재한다. 같은 시공간에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한다. 오늘도 내일도 아름다운 별빛은 쏟아진다. 기쁨도 슬픔도 같이 내려온다. 기뻐할 일이 없다. 슬픔도 같이 오기 때문이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 내일은 기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장욱진 화백은 가족을 그렸다. 아이들을 크게 그렸다. 아이들 주변에는 개도 닭도 있다. 화백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한 울타리에 있으면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솥밥을 먹으면 가족이다. 가족은 별 것이 아니다. 혈연으로 가족이기도 하고 인연으로 한 집에 살기도 한다. 한집에 살면 가족이다. 그럼 우리도 가족인가?
 
 
4. 자유의 역설
 
 인간에게 있어 자유는 물과 같다. 없으면 죽는다. 자유와 목숨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자유가 더 값지다. 자유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도 있다. 
 
소가 한마리 있다. 왕처럼 대접받는다. 먹을 것도 맘껏 먹고 잘 뛰어논다. 그럼에도 소는 설렁탕이 된다. 그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방목한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다. 소는 고기 덩어리로 변하기 때문에 목숨이 소주인에게 달렸다. 그것은 자유가 없음을 의미한다. 고로 자유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자유가 없으면 죽은 것과 같다. 
 
자유의 역설.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진짜 자유일까? 우리는 여름휴가를 떠난다. 자유라고 소리친다. 아니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자유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을 의미한다. 타율성은 소와 같은 것이다. 묶여 있든 안묶여 있든 자유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에서 나온다. 해외로 여행을 간다고 해서 자유는 아니다. 그렇다고 방바닥에 일주일 동안 누워있다고 해서 자유도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권리가 주어질때 가능하다. 몸과 마음이 매어 있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말은 어딘가에 매어있으면 그것이 자유를 박탈 당한 것이다. 

못가의 꿩 한 마리,
열 걸음에 한 입 쪼고,
백 걸음에 물 한 모금.

갇혀서 얻어먹기 그토록 싫어함은,
왕 같은 대접에도 신이 나지 않기 때문.

-장자 '못가의 꿩'.
 
 
노동자는 자유의 역설을 보여준다. 스스로 일을 선택한다.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유를 구속하는 선택을 한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받았다. 자유의 역설이다. 스스로 구속되려한다. 심지어 근로계약도 본인이 서명을 한다. 스스로 속박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자유를 주되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역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대의 작동원리다. 
 
고대사회는 수평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욕망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중국의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했다. 그리고 백성에게 자유와 욕망을 선물했다. 그러나 왠걸. 모든 욕망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오니 지옥으로 변했다. 사람들의 욕망이 한번에 터져나오면 통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태우고 사람들을 눈멀게 하는 자유의 역설을 시행한다. 자유를 주되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고대나 현대나 이는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자유는 에너지가 넘친다. 긍정에너지와 부정에너지. 고로 자율성과 타율성으로 나뉜다. 자유를 스스로 통제할 것인가 자유의 역설을 강요할 것인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판단.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비판한다. 
 
중세는 어떤가. 군주제. 욕망의 편집증이다. 자유를 구속하고 욕망을 군주에게 집중시킨다. 모든 사람의 욕망을 조여맨다. 고대에서 부터 시작된 '욕망과 자유' 압박은 현재 '자본'의 모습으로 변형된다. 
 
자유는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 들어 '욕망의 해방'을 선물했다. 하지만 자본은 마찬가지로 '자유의 역설'도 안겨줬다. 욕망을 해방하되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산과 소비에 있어 역설적인 행태를 보인다. 내가 만든 것을 내가 사용하지 못하는 현상. 필요없는 물건을 계속 소비하는 현상. 자본은 터져나오는 욕망을 짓누르기에 바쁘고 족쇄풀린 자유인을 새장에 가두기에 바쁘다. 자유인을 감옥에서 넣다 뺐다를 반복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고도비만이 된 상태다. 
 
자본은 먼저 욕망을 해방시킨다. '억압'을 탈코드화한다. 금욕의 영토를 벗어나게 하는 탈영토화를 진행한다. 하지만 자본의 '증식욕구'는 인간의 자유를 다시 옭아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에 '자유의 역설'로 탈코드화를 재코드화한다. 다시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법률을 보라. 사회제도를 보라. 가족제도를 보라. 모두 발에 족쇄를 채웠지만 '난 자유다'를 외치게 강요한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피로해진다. 인지부조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타율적인 자유를 자율적으로 인식토록 하는 강요때문이다. 
 
자본의 욕망 해방은 비관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하다. 철학자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인간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소외도 일으킨다".
 
자유를 원하는 인간에게 속박으로부터 '탈코드화' 된 사회는 다시 구속으로 '재코드화' 되는 공리계를 거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안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각한다. 마크쿠제는 반대다.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자본의 재코드화는 은밀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 예로 매음굴로 변질된 노조운동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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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장하는 남자
 
 요즘은 화장하는 남자가 많다. 화장은 이제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성이 화장을 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부터 남자도 외모를 꾸미는 일이 많았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남성과 여성을 불문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남성화장은 성격이 다르다. 아름다움을 넘어섰다. 욕망과 욕구를 표출한다. 기계적으로 욕망을 대변한다. 화장은 여성을 끊임없이 치장하게 만든다. 아름다움 보다는 욕구에 집중한다. 예뻐지는 것이 목적이 아닌 '예뻐지고자 하는 욕구'가 반복된다. 욕구자체가 화장을 더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초월한다.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남성의 얼굴에도 자리잡는다. 남성의 아름다움이 아닌 '화장의 아름다움'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왜일까?
 
자본은 무한증식이 목적이다. 화장은 남녀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화장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남녀를 떠나 화장은 애견, 애묘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자본은 욕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욕구에 불을 붙여 더 활활 타오르게 한다. 남성이 화장을 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에서 욕망으로 번진다. 남성과 여성 모두 욕망의 덩어리를 얼굴에 덧칠하게 된다. 매일같이. 이유는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욕망만 칠하게 된다. 
 
이는 욕망이 기계적으로 작동함을 의미한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욕망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면서 시장이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자본의 작동원리다.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욕망을 실현하는 인간. 이 노마디즘에도 문제가 생긴다. 자본의 생리를 피할 수 없다.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노마디즘은 욕망의 유목민으로 변질한다. 정처없이 떠돌면 집어등 아래 오징어처럼 욕망에 몰려들게 된다. 자본의 생리는 자유를 원하는 노마디즘에도 손을 뻗친다. 
 
프랑스 경제학자 '셰'. 보통 '세이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그의 이 주장은 오랫동안 경제학에서 폐기됐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부활한다. 그리고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구조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사람은 원해서 물건을 사지 않는다. 물건이 눈앞에 나타나면 사게 된다. 자본은 물건을 우리 눈앞에 들이댄다.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물건을 소비한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소모한다. 소비와 소모가 목적이지 가치와 쓸모는 사라진다. 
 
소비는 '수단과 목적이 아닌 소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욕망은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은 무의식적이며 능동적인 에너지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이다. 자본의 생리는 이 욕망과 버무려 움직인다. 긍정에너지 속에서 욕망의 파탄을 끌어낸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요소가 동시에 작용한다. 
 
욕망은 표상이 아니다. 구체화할 수 없다. 표상은 정해진 자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욕망은 형체를 알기도 어렵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니체의 권력의지와 같은 무의식적 욕망이다. 그래서 욕망은 관념이 아닌 유물론적으로 봐야 한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들뢰즈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불가능하며 이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돌리는 방법을 설명한다. 
 
결론은 욕망은 감출수도 막을 수도 없다. 욕망의 물꼬를 어떻게 트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욕망은 지금의 자본과 함께 발이 묶여 뒤뚱뒤뚱 걷고 있다는 것이다. 
 
2. 음악으로 치료가 될까
 
음악으로 사람을 치료한다? 음악은 심리적 반응을 일으킨다. 음악치료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은 육체와 마음을 복원시켜주는 것. 그리고 현상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 마지막으로 이를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복원시켜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음악은 정신과 신체건강을 복원시켜줌으로써 우울증을 치료한다. 유지하는 것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파킨슨 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뇌세포가 파괴됐다. 파괴되지 않은 뇌세포를 활성화 해 기력을 유지하고 정신건강을 돕는다. 
 
마지막으로 향상효과는 육체적으로 건강한데 우울하거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음악치료에서 북치기는 대근육 발달을 돕는다. 피아노 치기는 소근육 발달과 상호교류하는 능력을 키운다. 노래부르기는 발성법과 자기표현력 향상에 좋다. 음악은 주관적이고 치료는 객관적이다. 음악치료는 심미성, 예술성, 창의성을 끌어낸다. 
 
음악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자폐아와 조현증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이들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계절감각도 없다. 결핍된 기능을 적응행동으로 변화시키기에 음악은 도움을 준다. 
 
음악은 양적이며 내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먼저 음악은 사람의 생리적 반응을 이끌어 낸다. 혈압, 맥박의 속도, 호흡, 피부반응, 뇌파, 근육반응이 달라진다. 
 
특히 환자의 과거경험이나 문화적 배경, 선호도와 음악교육 정도에 따라 정서적 반응이 다르다.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도 과거에 들었던 노래가 나올 때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과거 경험과 살아온 흔적이 그를 끌어내는 것이다.
 
음악은 심리적 반응도 있다. 누워서 겨우 음성만 내는 사람도 '안녕'이라는 말을 한 사례가 있다. 음악은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어떨까? 반대로 음악이 있다면 세상은 어떨까? 음악을 듣고 상처받은 사람은 없다. 음악을 통해 상처받지 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치료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몸도 마음도.
 
 
1. 자본과 욕망
 
자본주의의 끝은 있을까? 역사가 발전해 온 모습을 보자.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자본주의도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인류사회는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형태만 변할 뿐 제자리 걸음을 할까? 계급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선형으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사회는 엄연히 자연처럼 계급이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절대정신이 가능한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사회가 변화할때 그 안에 자리잡는 역동적인 힘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힘이 작용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 힘은 현상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결과를 알아내기 힘들다. 마치 담배연기를 내뿜으면 뿜어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지만 그 형태를 예측하기 힘든 것과 같다. 담배연기는 내뿜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퍼지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공기중으로 번지는지 모양을 그릴 수는 없다. 자연현상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를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전개돼 나갈지는 미지수다. 그럼 우리는 현재 인간사회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발전해 나가는지 방향을 추측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역동적인 매력이 있다. 소유와 소비. 자본주의는 인간을 흥분시켜놓지만 책임지지 않는다. 혼을 빼가거나 주머니를 털어간다. 그런데 그 혼과 주머니는 더 채워넣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을 번다. 끝없이 소비하며 자본주의의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주머니는 왜 쪼그라드는가. 사람은 죄가 없다. 고용인, 고용자. 노동자와 자본가 둘다 죄가 없다. 사람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자본의 속성'에 있다. 주머니와 혼을 탈탈 털어가는 자본. 그리고 채워넣지 않는 시스템. 그것은 자본의 태생에서 찾아야 한다. 
 
자본은 과거와 다른 모습이다. 땅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사회와 다르다. 고대사회는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노예제도였다. 노예에서 나오는 노동력이면 그만이었다. 땅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는 땅만 보면 된다. 그곳에서 나오는 곡식이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자본은 다르다. 자본은 '증식'을 목적으로 한다. 수익보다 비용상승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벌어들이면 더 빨리 소비해야 한다. 잔고에 자산보다 빚과 비용이 더 빨리 차오른다. 고로 증식하지 않으면 죽는 속성을 가진 것. 그것이 자본이다. 노예의 노동력과 곡식의 소유와는 다른 성격이다. 
 
자본가도 노동자도 이 증식의 순환에 올라탄다. 세상을 망해먹으려는 자본가는 없다. 자신의 혼까지 탈탈 털어서 소비하려는 노동자도 없다. 자본의 힘은 '증식욕구'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자본가도 노동자도 이 '증식'의 열차에 올라탈 수 밖에 없다. 여성의 화장을 예로 들어보자. 화장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화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욕망은 끊임없이 화장을 하도록 한다. 예뻐도 더 예쁘게 만들려 한다. 화장은 예쁘게 보이는게 목적이 아니다. 화장을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변한다. 예쁜지 안예쁜지를 떠나 끝없이 화장을 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비로소 욕망의 오징어가 된다. 집어등을 켜면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욕망을 향해 무의미한 소비를 즐기게 된다. 소비의 중독. 그것은 자본의 '증식' 본능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분명 긍정적이다. 사람은 욕망을 해방함으로써 감시의 '모더니즘'을 탈피했다. 더이상 주체로서 의무적일 필요가 없어졌다. 이성을 중심으로 '똑바로 살아야만 하는' 근대주의를 벗어난다. 소련의 붕괴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의지하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 사람은 이성이 중심이여야만 했던 '주체의 시대'를 분해한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이성은 감성보다 솔직하고 논리적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작이다. 
 
이는 주체를 해체한다. 해체주의로 접근한다. 자본주의가 성숙해져 가면서 이성중심의 해체주의는 하버마스. 감성과 욕망의 중심의 해체주의는 들레브와 가타리로 이어진다. 지금의 사회는 후자에 기대를 건다. 이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모르파티. 니체의 말처럼 역경에 굴하지 않는 광기. 신들린 광기를 믿는 사회다. 과학도 이성도 우리는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감시의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해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는 여전히 고속질주다. 
 
'무의식의 욕망이 오히려 이성보다 낫다'
-들뢰즈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다.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다. 하지만 욕망을 해방시키는 역동적 에너지는 긍정적이다. 이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 끝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무의식의 욕망으로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탐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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