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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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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기자입니다.
(검찰개혁)여의도 집회서 '자원봉사'를 해보니

2019-10-20 23:23

조회수 : 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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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역에서 열린 '제10차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패스트트랙 입법 촉구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다. 기자로서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집회를 취재하거나 시민으로 집회에 참석해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을 다른 관점에서 살피고 싶었다.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안에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레논벽'을 만드는 걸 돕는 일을 했다. 레논벽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나무위키: 레논 벽(프라하)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레논벽 만들기의 자원봉사자들은 이날 오후 4시 국회의사당 인근에 있는 카페 '폴 바셋'에서 모였다. 예정된 촛불집회는 오후 5시부터였지만 사전 작전회의를 위해 먼저 모였다. 원래 레논벽은 국회의사당역 안과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담벼락에 붙이기로 했으나 회의를 하면서 전략을 수정했다. 국회의사당 담벼락은 표면이 울퉁불퉁해 포스트잇이 잘 붙지 않는 데다 자칫 특정 정당에 관한 비판이나 욕설이 나올 수 있어서 그곳엔 레논벽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또 마침 이날 우파 단체에서도 국회 앞에서 '맞불집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니지 않는 곳에 레논벽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레논벽 설치 장소는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로 정해졌다.



국회의사당역 안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줄 포스트잇을 개봉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스가 몇개 없어 보이지만 이날 준비한 포스트잇은 낱장으로 따지면 1만여장이나 됐다. 시민들에게 나눠줄 펜도 30여자루를 준비했다. 또 함께 자원봉사를 하기로 한 '5·18 역사왜곡 처벌 농성단'의 도움을 받아 시민들이 포스트잇에 글을 쓰기 편하도록 테이블도 2개 설치했다. 이렇게 대충 준비를 마쳤을 때가 오후 4시30분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이제 시민들을 모으는 일만 남았다. 처음엔 자원봉사도 하면서 현장을 촬영할 생각으로 삼각대도 가지고 갔으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장소가 워낙 협소했고 지나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삼각대를 설치해놓고 일을 하는 게 여의치 않아서다.



사진에 보이는 분은 '5·18 농성단' 소속으로, 이날 자원봉사를 도와준 형님이다. 농성단은 5·18왜곡처벌법 입법과 진상조사위 출범, 5·18 망언 의원에 대한 즉각적 처벌을 주장하며 200일 넘게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이번 레논벽 설치 행사에선 5·18 농성단의 도움이 무척 컸다.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역으로 쏟아졌고, 레논벽에 관심을 보이며 포스트잇에 글을 쓰려고 인산인해였다. 국회의사당역을 관리하는 '서울시메트로9호선'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자 행사를 저지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안전사고 우려가 발생했고, 시민들이 적은 포스트잇에 특정 정당과 정치인 이름이 적히는 등 정치적 의사표시까지 등장해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찰개혁에 비판적인 또는 문재인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일부 시민들이 레논벽 만들기 행사를 중지시키라고 민원을 넣고 있다는 것이다. 레논벽 설치 행사가 멈출 기미를 안 보이자 서울시메트로9호선 관계자들은 나중엔 경찰까지 불러서 행사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선 게 5·18 농성단이었다. 서울시메트로9호선이건 경찰이건 '5·18'이라는 말이 나오니 꼼짝 못 했다. 덕분에 다행히 행사는 계속 진행됐다.


 
사진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안에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레논벽 만들기 행사를 막 시작했을 때 모습이다. 시민들은 포스트잇 몇개가 붙어 있는 광경을 보고 신기해서인지, 또는 검찰개혁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포스트잇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어서 지하철 안 유동인구가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촛불집회 주최 측도 본 행사를 준비하기 바빠서인지 지하철 역사 안에서의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신경을 못 썼다. 그래서 아예 처음엔 포스트잇 뭉치와 펜을 여러 자루 들고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포스트잇으로 검찰개혁을 응원해달라", "검찰개혁을 위한 레논벽을 만들자"면서 지나는 '호객행위'를 하기도 했다.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레논벽 만들기 행사를 시작한 지 한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다. 5시를 지나면서 국회 앞, 그러니까 국회의사당역 밖에서 하는 본 행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지하철 안 유동인구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레논벽을 보고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포스트잇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문구를 써서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안쪽 벽에 붙였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사람, 자신이 쓴 포스트잇을 벽에 붙이고 인증사진을 찍는 시민도 있었다. 언론 가운데선 연합뉴스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가 이 광경을 취재했다.


한 아주머니가 포스트잇에 쓴 문구다. 다소 발언 수위가 높았다. 하지만 왜 윤석열 검찰총장을 비난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쓰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냐고 물어봤더니, 윤 총장이 하는 일이 다 마음에 안 들고 검찰개혁을 방해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분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담기엔 포스트잇이 너무 작았던 걸까. 그래서 앞뒤 다 자르고 핵심만 쓴 것 같다. 지난 7월 윤 총장은 검찰총장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반년도 안 돼 시민들의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이날 시민들이 쓴 포스트잇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응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지지, 특정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다수는 검찰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고 검찰조직의 쇄신을 요구했다. 시민들이 쓴 포스트잇엔 의미심장하고, 재미있고, 서슬이 퍼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몇가지 눈여겨볼 포스트잇은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다.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인지, 우연히 이 근처를 들렀다가 레논벽을 본 것인지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멕시코 여성인데, 우크라이나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왔다고 했다. 둘 다 포스트잇에 'I ♥ Korea'라는 문구를 썼다. 두 외국인을 보니 레논벽이 촛불집회의 목적을 더 쉽게 알리는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촛불집회에서 나오는 구호와 연설 등은 내용이 어렵고 집회가 끝나면 쉽게 휘발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 장소에 설치된 레논벽은 곧 명물이 되곤 한다. 체코 프라하와 홍콩에 있는 레논벽도 관광객을 모으는 명물이자 체코 민주화운동과 홍콩시위를 홍보하는 장소가 됐다.



사진에 나오는 귤은 자원봉사자들이 고생한다고 한 시민이 주고 간 것이다. 오후 4시30분부터 저녁 8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까지 레논벽 만들기를 도왔는데 운동 어플로 계산해보니 약 5㎞를 걸은 것과 같은 운동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계속 서 있어서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지만 검찰개혁을 촉구하며 포스트잇을 붙이는 시민들을 보니 이번 검찰개혁 촉구 촛불집회를 두고 '2016년 촛불혁명의 재현'이라는 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레논벽 만들기 행사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안전사고와 정치적 의사표시를 우려해 국회의사당역을 관리하는 서울시메트로9호선 측이 지속적으로 행사 중단을 요청했다. 사진 오른쪽에 모자이크 처리된 사람도 그런 관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자신도 이런 일(검찰개혁 촉구)을 지지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다"면서 "검찰개혁에 반대하고 레논벽 만들기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의 의사도 존중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한가지 놀라웠던 점은 포스트잇을 붙이던 시민들까지 나서서 이 관계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역이 서울시메트로9호선에서 운영하기는 하지만 시민들이 오가는 공공장소 아니냐,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라고 주장했다. 또 "국회의사당역 안을 모두 포스트잇으로 붙이는 것도 아니고 '3번 출구 안'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만 행사가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사당역 전체에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다"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쓴 검찰개혁 촉구 포스트잇을 마음대로 훼손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도 했다.



사진은 저녁 8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 레논벽 만들기 행사를 마치고서 찍은 전체 모습이다. 사실 레논벽 만들기는 타의로 인해 행사가 종료됐다. 서울시메트로9호선 측과 경찰은 자원봉사자들을 설득해 레논벽 만들기를 중단시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회의사당역 2·3번 출구를 모두 막아버렸다. 또 국회의사당역에서 하차한 승객들이 2·3출구로 가는 길도 봉쇄했다. 포스트잇을 쓰러 가는 사람들이 아예 없도록 만든 셈이다. 그렇게 해서 이번 행사는 예상보다 일찍 종료됐다. 애초 준비한 포스트잇이 1만여장이었는데, 모두 세어보진 않았으나 대충 4000장 정도가 붙은 것으로 보였다. 여의도 집회를 주관한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는 3만명 규모로 집회신고를 했다. 대략 그 정도 인원이 왔다고 하면 집회 참가 인원 10명 중 1명은 레논벽 만들기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막상 레논벽이 설치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민의(民意)를 표출한 것이라서 행사 중단을 요청했던 서울시메트로9호선 측과 경찰도 끝내 벽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내지 못했다. 시민의 힘이 그만큼 무섭다는 걸 새삼 느꼈다.

*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레논벽이 완성된 지 하루가 지난 일요일엔 일단의 무리가 레논벽을 훼손했다고 한다. 레논벽을 지키던 5·18 농성단이 훼손 시도를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 최병호

최병호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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