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게이션)무덤 속 히치콕 조차 감탄할 ‘런’의 긴장감
절제와 생략 선택과 집중 아우른 ‘복제’와 ‘재창조’의 연출
스토리 넘어선 ‘설정’과 ‘구성’ 치밀함 모든 것 배경…‘의심’
2020-11-18 00:00:01 2020-11-18 00: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단 한 글자에 담긴 긴장감이 이 정도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언어의 존재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작 서치를 통해 형식의 파괴가 기상천외한 흥미를 전달해 줄 수 있단 점을 증명해 낸 아니쉬 차칸티 감독은 신작 을 통해 공간의 극단적 제약이 만들어 낸 섬뜩하고 극악스런 긴장감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이 감독의 재능은 스릴러의 신알프레드 히치콕 조차 무덤 속에서 일어나 경탄할 정도다.
 
 
 
이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복제에서 끝나지 않았단 점이다. ‘은 꽤 많은 레퍼런스가 존재하는 영화다. 레퍼런스를 참고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가 극악스런긴장감을 전달하는 것은 극단적인 절제와 생략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복제를 레퍼런스로 한 재창조에 있다. 여러 주요 장면과 설정이 봤음직하다. 그래서 긴장의 끈이 조여지지만 뒤에 일어날 상황이 예측된다. ‘은 이 점에 주목한다. 관객이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낼 때쯤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제시한다. 찰나의 긴장을 찰나의 순간으로 채워 버리니, 관객은 연신 뒤통수를 맞고 또 오금이 저리게 된다. 공포의 감정이 아니다. 오롯이 주인공 클로이로 관객 각자를 치환시켜 버린다. 만약 여기까지 감독이 계산하고 설정했다면 은 사실상 전무후무한 복제의 재창조로 남게 될 것이다.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은 시작부터 끔찍하다. 천식, 심장과 피부질환, 당뇨, 하반신 마비 등. 주인공 클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몸 안에 지니고 나온 선천성 질환이다. 하지만 엄마 다이앤의 헌신적인 간호와 치료 덕분에 대학 진학을 앞둔 상태까지 잘 자랐다. 그들의 일상은 그렇게 다이앤의 헌신적이며 모성적이고 이타적인 색채로 가득하다. 매일매일 삼시세끼 딸 클로이를 위한 식단, 삼시세끼 이후 이어지는 수십 가지 먹는 약과 주사가 일상이다. 그럼에도 기묘하게 이상한 점은 있다. 클로이는 항상 뭔가 불안하다. 집안에만 갇혀서 생활하는 그의 일상은 묘하다.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클로이의 생활 반경이 굳이 2층에만 국한된 것도 의외다. 1층과 2층을 이동장치로 옮겨 다닐 수 있지만 굳이란 인상이 들 뿐이다. 입학 지원을 한 대학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지만 언제나 엄마의 손을 한 번 거치고 클로이 손에 들어오는 우편물들. 엄마는 뭔가 숨기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엄마는 고요하다. 극단적으로 침잠돼 있다. 반면 클로이는 인간적이다. 사람 냄새가 난다. 이들 모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두 사람의 이상한 동거와 기묘한 모녀 관계 균열은 의외의 지점에서 일어난다. 당뇨로 고생하는 클로이가 엄마 몰래 초콜릿을 훔쳐 먹으려던 순간이다. 장바구니 안에서 발견된 엄마 다이앤의 이름이 적힌 약통. 하지만 그 약은 잠자기 전 엄마 손으로 클로이에게 전달된다. 주치의 소견으로 약을 변경했단 엄마 다이앤의 주장. 뭔가 석연치 않다. 클로이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려는 듯한 엄마 다이앤의 행동.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서 홈스쿨링으로 대학 진학까지 앞둔 클로이의 영특함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딸이 엄마를 의심하는 상황이다. 이때부터 관객도 눈치를 챈다. 선천적으로 수많은 질병을 안고 태어난 클로이. 그런 클로이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주변의 귀감이 되고 있던 엄마 다이앤. 정말 클로이의 의심이 사실일까. 엄마 다이앤에게 어떤 비밀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기상천외한 연출자 아니쉬 차칸티 감독의 또 다른 계산이고, 그 계산을 뒤 흔들어 버릴 충격적 반전이 펼쳐질까.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은 스토리가 우선되는 국내 장르 영화 마니아들에게 설정구성의 치밀함이 스토리의 진부함을 넘어설 수 있단 주장을 증명한다. ‘은 사실, 그리 뛰어난 스토리는 아니다. 밀실에 가까운 공간에 갇힌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가둔 것(?) 같은 또 다른 사람의 치밀한 심리 게임이다. 수 많은 장르 영화가 교본처럼 사용해 온 설정이다. 여기서 의 차별 지점은 가둔 것인지, 갇힌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다. 나아가 관계의 의심이다. 가둔 것인지, 갇힌 것인지에 대한 전제 조건은 두 사람의 관계성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다이앤의 출산 장면, 그리고 클로이의 심각한 선천성 질병을 공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성에 대한 의심을 사전에 차단한다. 모녀 관계 설정이라면 관객의 의심은 흐려지고, 그 배후를 의심하게 된다. 감독의 치밀한 설정이 어떤 비밀을 숨겼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곧 의심이다.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그래서 은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다이앤과 클로이의 관계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시작한다. ‘의심의 여지를 차단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흐름이 진행될수록 의심의 색깔은 더 짙어진다. 눈으로 보고 있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이 더욱 짙어지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극단적이고 극악스러울 정도의 단촐함 때문이다. 주요 출연 배우가 다이앤과 클로이 단 두 명이다. 후반부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지만 스토리 흐름을 변환시킬 장치적 인물일 뿐이다. 두 사람으로만 출연 배우를 제한시킨 감독의 자신감은 공간이 만들어 내는 공기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완벽한 연출력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처음부터 마지막 엔딩 컷까지 모든 장면이 힌트고 스포일러다. 다이앤과 클로이의 표정과 시선조차 이 영화에선 완벽한 힌트였으며, 스포일러다. 이런 팩트는 영화 초반 화면 사이즈를 극단적으로 줄여 버리고 관객 시야를 좁게 만들어 버리는 감독의 기민한 연출력이 뒤에 숨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 점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 스스로도 모르게 점차 넓어지는 시야의 확장은 관객의 시선이며, 곧 주인공 클로이의 시선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비밀이 영화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다. 하지만 영민한 관객이라면 마지막 즈음의 충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니쉬 차칸티 감독은 또 하나를 집어 넣었다. 이 영화, ‘이 갖고 있는 진짜 마지막이다. 엔딩 장면의 통쾌함 그리고 짜릿함. 그 두 가지를 넘어선 공포감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진짜 마지막 패배감이 몰려 온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완벽하게 패배한다.
 
영화 '런' 스틸. 사진/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아니쉬 차칸티 감독이 만들어 놓은 완벽한 밀실 스릴러. 90분이란 믿을 수 없는 경제적인 러닝타임. 담을 것만 담고 필요 없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이 말을 건다. ‘당신은 이 게임에서 졌다라고. 무덤 속 히치콕 조차 경탄할 수 밖에 없는 90분의 긴장이다. 개봉은 오는 20.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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