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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주목되는 청와대 발 받아쓰기 금지
2017-05-29 06:00:00 2017-05-29 06:00:00
최한영 정경부 기자
지난 2013년 2월 개봉한 영화 신세계의 명장면 중 하나로 정청(황정민 분)의 이중구(박성웅 분) 교도소 면회장면이 꼽힌다. 이 때 이중구 뒤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기록하고 있던 교도관역에 섭외된 한 스태프의 후일담. 그가 공책에 열심히 적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이었다고 한다.
 
경우야 다르지만 비슷한 장면이 과거 정부에서도 목격된 바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워크숍에서 "회의 때 메모한다고 해서 가까이 가보면 낙서하고 여자 얼굴 그리고 있더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전임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나온다.
 
각종 정보기술(IT)기기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손글씨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펜을 꾹꾹 눌러가며 쓰는 과정 속에 디지털 기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굳이 안해도 될 메모를 해야 한다면 이는 불편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2015년 10월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여·야 지도부 회동에서 이종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두 시간 가까이 ‘받아쓰기’를 해야했다. 대변인도 배석하지 않은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녹취를 허락하지 않음은 물론 속기록도 주지도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당시 새정치연합 대표가 강하게 항의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쉬지 않고 펜을 움직여야 했을 이 원내대표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된다.
 
고개를 들지 않고 내용을 받아적기에 급급했을 그가 대화에 충분히 참여했을리는 만무하다. 필기라는 ‘나무’만 보느라 토론 전체 내용을 조망하는 ‘숲’을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학창시절 고개숙여 필기에 열중하다보면 정작 수업 전체 흐름을 놓쳤던 것과 비슷한 이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5일 취임 후 첫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며 “이제부터는 받아쓰기를 할 필요도 없다”고 선언했다.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추후 프린트해서 나눠줄테니 받아적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달라고 당부했다. 단순히 전임 정부 수석비서관회의 분위기를 놓고 나왔던 비판을 넘어, 그간 잊혀졌던 청와대 내 토론문화를 살려보자는 의미로 읽힌다. 문 대통령의 이같은 조치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수평적 사고방식과 토론문화 확산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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