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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피해자만의 ‘미투’를 넘어서기
2018-02-19 08:00:00 2018-02-19 08:00:00
“안 돼!”
“나쁜 아저씨가 여러분 몸을 만지려고 하면 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해야 해요.”
 
어릴 때 이렇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다. 이십대 중반 여성인 내가 그동안 공적 영역에서 받은 거의 유일한 성폭력 예방 교육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잠재적 피해자는 성폭력 위협 상황에 처하게 됐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최선을 다해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라고 학습받았다. 성폭력 위협 상황이 오면 단호하게 거절하고(“안 돼!”, “하지 마!”), 도움을 요청한 뒤(“도와주세요!”), 가해자가 빈틈을 보인 사이 재빨리 도망치라는 내용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이런 내용의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방 교육이 실제 상황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 최근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 안나 몰라 박사팀은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70%가 피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항능력이 마비되는 ‘긴장성 부동화’상태에 빠진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안 돼”는 강자의 언어이다. 구조적 이유에서든, 물리적 이유에서든 약자는 자신을 향한 위협에 거부의사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설령 피해자가 간신히 용기를 냈다 해도 그의 거부의사 표시를 접한 성폭력 가해자가 급작스런 각성을 통해 범죄를 멈출 가능성은 희박하다. 되레 협박, 폭력, 살인 등 추가적 범죄로 이어질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가해자가 이미 자신이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을 만한 대상과 상황에 대한 탐색을 끝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저항 여부는 성범죄 저지의 유의미한 변수로 작동하지 않는다. 피해자로서 저항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없다. 성폭력은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동의의 문제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명시적 동의 없이 시도된 성적인 행동은 그 자체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안 돼”를 외쳤든 외치지 않았든, 피해자는 자신의 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떠안게 된다. 어떤 측면에서 “안 돼”는 가해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떠넘기는 기능을 한다. 기존 성폭력 예방 교육은, 당연히 전적이진 않지만, 피해자의 ‘용기’에 기댄 성폭력 방임 교육인 셈이다.
 
미투(#MeToo) 운동도 피해자의 용기에 기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미투 운동의 핵심은 피해 당사자의 고발이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불특정 다수를 설득시킬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하며 당시의 심정이나 현재의 피해상황을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이샘은 내게 함께 타자 하셨고 그 차에 탔다. 그 차엔 운전하는 선배와 나와 이샘이 탔는데 이샘은 내게 안마를 요구하셨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입으로 하라고 자꾸 힘으로 날 끌었다. 그 힘이 너무나 셌고 무서웠고 앞에 운전하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렸다. 그 후에 극단생활은 지옥 속이었다. 이샘은 늘 나를 찾았고 난 괴로웠으며 아팠다.”, 쏟아지는 ‘이윤택 성추행’ 폭로 “직접 사과 기다린다”, CBS노컷뉴스 2018년 2월 16일)
 
피해자의 용기에 기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고발 뒤엔 대체로 2차 피해가 뒤따른다. 피해자의 평소 옷차림, 성격, 대인관계, 평판 등이 공개되고, 당시의 대처 여부, 고발의 시기, 고발의 목적 등이 심판대에 오른다. 피해자는 여론과 언론에 의해 끊임없는 N차 피해를 당하게 되지만, 실체적인 보상과 추가 피해에 대한 예방책은 전무하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의 자기파괴적 생존전략이다. 이번 운동을 통해 사회의 진일보를 기대하는 이들에겐 하나의 중요한 역사이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삶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절박감에 내몰린 피해자들에겐 대안 없는 선택지다. 가해자 대부분은 술과 망각 어디쯤에 숨어버린다. 그들은 당장은 나름의 (어쩌면 스스로 판단하기에 재수가 없어서) 불편을 겪지만 역시 대부분 살아남는다. 반면 피해자에겐 대체로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낙인이 따라다닌다. 성폭력 사건에선 물론 가해자가 잘못했지만 ‘피해자도 좀 이상하다’라는 단서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동안은 그랬다.
 
성폭력을 고발하고 싶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 상황에 비해 일견 나아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고발의 책임이 다시 피해자에게 주어졌단 점에선 근본적으로 암울하다. 미투 운동이 분명 크나큰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으며, 우리는 용기 있게 고백한 당사자들에게 응당 지지와 위로를 보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선 곤란하다.
 
요체는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구태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지 않더라도 피해를 구제받고 가해자가 처벌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미투 운동은 악질적이고 이름이 알려진 일부 가해자만 단죄하고, 그것도 가해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단죄하지 못하고 세월 저편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다. 말 못하던 피해자들이 ‘감히’ 가해자를 고발한다는 사실에 놀라 사회가 대단하게 바뀐 양 호들갑 떨 필요 없다. 피해자, 약자의 희생과 추가적 희생에 기대 성취된 진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총체적인 진보가 한 가지 사건, 하나의 운동으로 단번에 달성되지 않는다. 미투 운동은 진보를 향한 이러한 변화를 격발시켰다. 미투 운동의 확산과 함께 이제 총체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하나씩 타진해 갈 때이다. 미투 운동은 하나의 성취이지만, 분명히 할 것은 동시에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서 근본적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사족으로 ‘유투’를 덧붙인다. ‘나를 뺀 가부장제와 내가 동참하지 않은 술자리 문화’를 향한 섀도우 복싱을 멈추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직시하자. SNS 같은 데에 앞으로의 완전무결한 삶을 다짐하며 지난 ‘기행’을 성찰하지 말고, (피해자한테) 먼저 사과하자. 타인의 삶을 마주대함으로써 당신의 삶 또한 ‘구제’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송은하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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