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게이션) ‘버닝’, 관객에게 묻는다 “정말 진짜인가?”
의식과 현실 관념과 이데아 등장...거장의 이미지 철학
종수의 시선-벤의 하품-해미의 나체, 존재하는 것일까
입력 : 2018-05-17 12:11:32 수정 : 2018-05-18 08:53:08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버닝’, 이 영화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아니 질문을 던진다. ‘정말 태웠을까’ ‘누가 태웠을까?’ ‘무엇을 태웠을까?’ ‘종수는 진실을 보고 있던 것일까?’ ‘벤은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 ‘해미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고양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창동 감독 신작 ‘버닝’은 온통 질문으로 뒤덮여 있다. 종수(유아인)의 관념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허상처럼 느껴졌다. 한 순간에 다가온 꿈처럼 혹은 의식처럼 해미(전종서)의 존재도 벤(스티븐 연)의 실체도 종수에겐 몽환적이다. 도대체 종수는 무엇을 바라봤고 그 안에서 무엇을 잡았던 것 일까. 해미와 벤을 통해 자신 안에 응축된 욕망이 관념적으로 투영된 환상이 실재했던 것일 것. ‘버닝’의 관념은 이창동 감독이 ‘버닝’의 세계 속에서 이데아를 끄집어 낸 듯 존재와 허상의 경계선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과정은 장르 영화 작법 중 하나인 미스터리 방식을 취하며 스토리를 구성한다. 구성된 ‘버닝’의 얘기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기묘하고 기괴한 꿈처럼 붉게 타오른 뒤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종수는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한다. 그저 한 편의 현몽(現夢)이었음을. 그 대상은 ‘해미’일수도 있고, 벤 이었을 수도 있으며 두 사람 모두였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해미와 벤은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는 상당히 은유적이다. 일종의 메타포가 지닌 숨은 기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는 소극적이다. 집을 나간 어머니 그리고 폭력 전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 그는 고아나 다름 없다. 시골의 빈집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를 기다린 것은 작은 송아지 한 마리다. 홀로 남은 종수와 송아지. 모두가 부모(어미)가 없다. 그들은 결핍의 표본이다.
  
영화 '버닝'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그런 종수 앞에 해미가 나타난다. 종수와 해미는 어릴 적 소꿉친구다. 해미만 그것을 기억하는 눈치다. 종수는 기억 속에서 해미의 존재가 지워진 상태다. 종수는 해미의 집으로 이끌려 간다. 그 곳에서 섹스를 한다. 행위 자체의 섹스인지 수컷으로서 암컷에 대한 본능적 갈망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한 모성의 결핍이었을 수도 있다. 이 장면 역시 직접적이지만 이후 등장하는 모든 화면에서 관념화된 일상, 즉 해미의 집에서 홀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벤이다. 종수와의 육체 관계 이후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만난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 앞에 나타난다. 벤은 모든 면에서 종수와 반대다. 여유롭다. 풍족하다. 부족함이 없다. 웃음이 많다. 모든 것에 대한 실체화를 실행한다. 갖고 싶으면 갖고 버리고 싶으면 버린다. 태워버리고 싶으면 태운다. 그리고 지운다. 벤은 종수의 내면 속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 같다. 종수는 질투를 한다. 시기를 한다. “어떻게 저 나이에 이렇게 풍족하게 살까”라며 읊조린다. 벤의 재력이 부럽다. 해미가 자신과 벤을 비교하는 것 같다. 종수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벤은 때때로 해미를 보며 하품을 한다. 그런 모습에 종수는 더욱 참담하다. 벤은 정말 존재하는 인물 일까.
 
영화 '버닝'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한다. 단 한 번 섹스가 그에게 던져 준 감정이다. 사실 사랑인지 모르겠다. 그저 종수는 지키고 싶다. 해미를 갖고 싶다. 가질 수 있는 단 하나다. 깨끗하고 부유한 벤의 집과 달리 무너지고 허름한 종수의 시골 집. 종수는 자신의 집 마당에서 벤에게 욕지기를 내뱉는다. “해미를 사랑한다”고. 건들지 말라고.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마저 빼앗지 말라고.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이 부끄러운 것 일까. 아니면 그것을 몰라주는 해미의 마음이 야속한 것 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욕지기에도 해미의 뜨거운 행동에도 그저 하품으로 일관하는 벤의 속 모를 행동이 불안한 것 일까. 종수는 자신의 단 하나 남은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해미가 떠나간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흔적(마스터베이션)을 남긴다. 자신의 집 동네 주변을 뛰며 벤의 흔적을 찾으려 애쓴다.
 
이제 종수는 욕망을 폭발시킨다. 평생을 숨기고 살아온 욕망이다. 자신에게서 사라진 해미. 자신을 비웃는 듯한 벤. “내가 태워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것들은 저 곳에서 날 기다린다”며 스스럼 없이 욕망을 드러낸 벤. 그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나 보죠”라며 해미의 행방을 종수에게 던진다. 눌려 있는 종수, 사라진 해미, 드러내는 벤. 도대체 세 사람의 관계는 무엇이고 이들은 각각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종수에게 해미는 욕망 일까. 해미에게 벤은 욕망 일까. 벤에게 종수와 해미는 욕망 일까. ‘버닝’은 결국 모든 것을 태워버리며 관념의 실체를 드러낸 클라이맥스의 강렬함을 스크린에 또렷이 새긴다.
 
영화 '버닝'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관념과 철학 그리고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로서 ‘버닝’은 종수와 벤 그리고 해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버닝’이 던진 질문에 답은 관객이 스스로 찾으면 된다. 과연 자신을 태워주길 바라던 비닐하우스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일까. 해미는 정말 존재하던 실체일까. 연기처럼 사라진 그는 무엇이었을까. 질문은 끝도 없이 맴돌고 또 존재한다. ‘버닝’은 그렇게 관객들의 관념을 연기처럼 시커먼 재로 만들어 버리고 태운다.
 
16일 오후(현지시간) 칸 영화제에서 공식 스크리닝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버닝’이다. 찬사와 극찬이 쏟아지고 있다. 현지 분위기로는 가장 유력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거론 중이다. 국내 개봉은 17일.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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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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