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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그의 눈은 북을 향하고 있었다”
(1-서론)1998년 소떼 방북, 남북경협사업 시작 알리다
2018-07-21 06:00:00 2018-07-22 06:53:36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열여덟 살이던 1933년 (···) 아버님이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 이제 그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저의 이번 방문이 (···)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환경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난 1998년 6월 16일, 당시 84세였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년 출생·2001년 별세)은 아버지가 소 판 돈을 갖고 18살에 가출한 빚을 이제야 갚는다면서 소떼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었다.
 
소는 큰 몸집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비폭력적이고 인내심이 강한 동물이다. 또한 근면과 희생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산은 이데올로기를 떠난 순수한 한민족 민초의 상징을 소에 부여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가 소떼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은 것은 남북한 동포, 그리고 세계를 향해 통일의 열망을 알리기 위한 마지막 절규였으며, 세기의 시위였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소르망(Guy Sorman)은 ‘소떼방북’을 두고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거대한 실리의 혜안을 담고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의 길을 연 소떼방북을 전위예술의 추상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크게 부족하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1차 소때 방북 직접 키운 소 500마리를 북측에 보내기에 앞서 소고삐를 잡고 환송인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한국 사회에서 아산만큼 복잡한 평가를 받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는 ‘개발독재’ 시대의 대표적 재벌이었지만 오히려 진보 진영에게서 인정받고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 사업인 남북경제협력사업(경협) 때문이다. 보수 진영은 그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경협을 돈키호테, 노망이라고 폄하하거나, 그의 경협을 이해하는 측조차 말년의 감상적 수구초심 정도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평가 여하를 떠나 정작 그가 어떤 구상을 하면서 경협에 나섰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는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1998년의 세기적 이벤트, 소떼 방북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산의 경협 구상이 오랜 기간 축적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자신의 기업을 포함한 한국 경제의 돌파구를 남북경협과 북방경제권에서 찾는 구상을 해왔다. 1989년과 1998년의 공개적 방북을 통해 그 구상을 일정하게 실현했다. 경협을 구상하고 실현하기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소요된 셈이다.
 
아산의 경협 추진력을 ‘순수한 열정’ 또는 ‘고향 사랑’으로 이해하면 정작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윤만준 전 현대아산 사장은 아산이 “근본적으로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결코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분단 장벽을 넘어 시장과 자원의 보고인 동북아 대륙에서 그리고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하는 분단을 넘어 자신이 줄곧 주창해온 대로 자유기업이 활개를 펼 수 있는 경영 환경을 조성하고 장애 요인을 돌파하는 데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상식적인 기업인이었다. 이처럼 상식적 기업인이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은, 경영 외적 장애 요인을 타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한국 기업의 ‘기업가정신’이 그 정도에 머물러 있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냉전의식에 압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를 역임하며 아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는 아산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이같이 설명했다.
 
"정 회장은 나라의 법은 원칙적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민족적 숙원인 남북통일이라는 진로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측근에 비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든 실정법이든 어디까지나 한 시대의 사상가나 정치 세력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해집단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시대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서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역사가 이러한 것들에 의해 방해받기엔 너무나 절실하고 지고하며 영속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시비에 대한 평가를 최종적으로 후대와 역사에 맡기고 그의 신념을 그 특유의 행동력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국 신용평가기관들이 흔히 지적하는 한국 신용 등급의 최대 불안 요인은 분단 리스크이다. 정작 한국 현대사를 보면 정치인에서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불안’에 익숙해져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이를 헤쳐 나가기보다 오히려 이를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아산은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부터 공산권과 북한을 주목하고 경협 구상을 구체화해갔다.
 
아산은 기업인의 입장에서 당시의 경제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무슨 생각으로 경협의 길을 힘들게 개척한 것일까. 물론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전후할 무렵과 같이 특정 시기에는 여타 기업들도 유행처럼 경협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한국의 재벌 가운데 남북경협-북방경제권을 연동시킨 거대한 구상을 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끈질기게 일로매진한 사람은 아산 뿐이었다. 기업인으로서 아산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일 수 있지만, 이 점은 분명히 주목되어야 한다.
 
아산은 남북이 서로 윈-윈하는 거대한 실리의 바다 속에서 적대감의 응어리를 녹여낼 수 있다는, 냉전적 적대감에 갇혀 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파천황’의 발상을 하고 실천했다. 그의 ‘독특한’ 추진력과 이를 가능하게 한 구상을 추적하는 것은 향후의 남북 관계 정립을 위해 큰 의미가 있다. 그가 구상하고 추진한 경협은 주관적으로 싫건 좋건 객관적으로 결국 한반도 구성원이 풀어야 할 현재와 미래의 숙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소떼 방북 및 금강산 관광사업 20주년을 맞는다. 안타깝게도 아산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등 경협은 모두 중단된 상태다. 다만, 두 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 개최로 갈등은 해소 국면을 맞이해 사업 재계의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아산의 남북경협 사업 추진과정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지난 2015년 아산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가 발표한 학술 논문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을 바탕으로, 박정웅 대표 등이 저술한 아산에 대한 책자와 언론 보도 등을 보태어 정리했다.
 
1980~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1989년의 첫 방북, 1998년 소떼방북을 계기로 이뤄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을 주요 소재로 해서 아산이 경협을 구상하고 추진한 배경과 목적 그리고 그것이 남북 관계와 남북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고자 한다.
 
경협 참여를 희망하는 기업과 기관들이라면 아산의 업적을 교훈 삼아 자신의 상황에 맞는 미래를 구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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