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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3만달러 시대의 기업공시
2019-01-23 06:00:00 2019-01-23 06:00:00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60대 그룹의 공시의무 이행여부 점검 결과 35개 그룹이 194건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금호아시아나, 한국타이어, 신세계, 부영 등의 재벌에게 23억3000여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새로운 수법도 등장했다. 금호그룹 계열사인 아시아나개발은 지난해 6월 금호티앤아이에 6차례 나눠서 100억원을 빌려줬다. 금호산업은 2016년 12월 92억원을 금호고속에 빌려주면서 2차례로 나눠 집행했다. 그러나 금호는 이 사실을 공시하지 않았다. 50억원 이상을 계열사에 대여할 경우 반드시 공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회피한 '쪼개기 거래'였던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공시의무 위반이라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었다. 
 
공시와 관련된 ‘사연’은 지난해에는 유난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미국 바이오젠과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주식매수청구권(콜옵션) 계약을 맺고도 고의로 공시를 누락한 것으로 드러나 검찰에 고발됐다. 또 같은 달에 네이버는 영화·웹툰 등 콘텐츠 유통 N스토어 사업을 분할해 자회사인 네이버웹툰으로 합병하겠다고 공시했다가 그 다음날 번복했다. 
 
한국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대기업의 공시가 이렇듯 꼼수와 뒤집기로 점철됐다. 국가대표 선수가 군복무 면제 요건을 맞추기 위해 허위로 봉사활동 기록을 만들어 제출했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재벌의 공시와 관련된 사건과 해프닝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국경제에 ‘투명’이란 개념조차 희박했던 ‘무명(無明)의 시대’로부터 쌓여온 악습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도 이런 악습이 초래한 재난이었다. 이런 쓰라린 일을 겪고도 대기업들은 여전히 거짓공시를 예사로 한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도 따라한다, 지난해 코스닥 시장에서 불성실 공시는 101건으로 2017년보다 30건(42.3%) 늘어났다.
 
한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했다. 올해도 얼마간 더 늘어날 것이다. 숫자상으로는 이제 3만달러시대에 확실히 진입한 것이다. 전세계에서 인구 2000만 이상의 국가 가운데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는 나라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한국도 이제 그 대열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의 악습은 버릴 때도 됐지만, 여전히 살아 숨쉰다.
 
대한민국은 시장경제를 경제의 기본원리로 삼고 있고,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는 신뢰이다. 신뢰를 실현하는 첫 관문은 기업공시이다. 기업공시의 원리는 국회나 법정에서 행하는 증인의 증언이나 선서와 비슷하다. 진실된 증언은 국회 심의와 법원의 재판이 올바르게 진행되고 옳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관건이다. 증언대에 선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가감없이 진실되게 증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보증하는 것이 바로 증인선서이다. 
 
불멸의 명저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대로마에서는 원로원이나 법정에서 하는 선서의 무게는 무거웠다. 누구든 일단 선서를 하면 거짓으로 증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로마의 구성원, 특히 지도층 인사들이 그 철칙을 지켰다. 그런 책임감이 있었기에 로마는 천년 동안 고대 서양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기업의 공시는 국내외 투자자나 채권자, 정책당국을 향해 내놓는 증언이요 선서이다. 따라서 신뢰와 책임감은 공시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가경제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대기업은 진실한 공시를 앞장서 실천할 필요가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기업이 스스로 정확한 공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장경제의 이치에 어울리고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책임감이 한국 대기업에게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금융당국이나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최근 기업공시에 대한 점검과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자사주에 관한 공시를 대폭 강화한다든가 지배구조 핵심사항 공시를 의무화했다. 
 
새로운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대기업의 허위공시가 되풀이된다면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런 규제와 제재를 만들거나 없애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요 신도 아니다. 대기업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거짓공시를 했을 경우 더 무겁게 제재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국회나 법정에서 위증을 하면 엄중 처벌을 받는 것처럼. 
 
한국이 3만달러 시대에 진입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4만달러나 5만달러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공시에 대한 기업들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 과거의 악습을 청산하고 보다 진실해져야 한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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