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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담론의 허상과 위험성미·중 경쟁은 종종 신냉전에 비유되곤 한다. 무역분쟁부터 시작한 미·중 대립이 기술, 군사, 인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은 2020년 8월 ‘공산주의자 중국과 자유세계의 미래’라는 연설을 통해 미·중 경쟁에 이데올로기적 색채까지 분명히 한 바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현 국제정세를 자유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진영 간 대결로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유사한 프레임이 한국 언론에서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서방 대 반서방 신냉전 격화, 중간지대가 사라진다.”가 최근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이다. 학계 일각도 마찬가지다.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전략적 명확성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진영 간 대결 구도가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의 단결을 촉발했으며, 인도·태평양 지역과 나토와의 연계 움직임을 강화시켰다.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이 한국, 일본에 파견되어 연합훈련이 실시되었고,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이 나토 정상회의에 초대되었다. 한편, 반대 진영에선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이 심화되는 모양새다.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이 직접 만나 “한계 없는 파트너십”을 선언하는가 하면,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나토의 결속과 인태 전략에 맞서 유라시아 대륙 내 반서방 블록을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신냉전에 빠져들고 있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외견상 양분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국가들이 훨씬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진영 선택이 아니라 국익 우선의 실용적 외교를 하고 있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인도가 대표적이다. 인도는 미국의 인태 전략에서 빼놓을 수 있는 핵심 국가다. 인도 없는 인도·태평양 구상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동시에 인도는 중·러와 손잡고 브릭스, 상하이협력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인도는 또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에도 분명하게 불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비동맹 전통이 강한 인도뿐 아니라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 동맹국들도 헷징의 외교 행태를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러 제재에 불참하고, 중국과는 원유거래를 위안화로 하는 등 독자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독일도 대중 경제 협력의 실리를 챙기는 데 주저함이 없다. 숄츠 총리는 시진핑 3연임이 확정되자마자 서방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베이징으로 달려가서 시진핑으로부터 유럽 에어버스 140대 구매 계약 등 두둑한 선물을 받고 돌아왔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서 유럽 국가들이 대만 문제에 대해 미국의 추종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충격적 발언을 했다. 미국은 물론 유럽 내에서 당혹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킨 마크롱의 발언은 미·중 전략경쟁의 최대 화약고인 대만 해협 문제에 대해 서방이 단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노출시켰다. 진영 대결의 흐름 속에서도 헷징이 범람하고 각자도생의 외교가 판치는 것은 현재의 미·중 경쟁이 냉전 시대 미소 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소 냉전은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시스템이 존재론적 위협을 걸고 대립한 세상이었다. 반면에 현재의 미·중 경쟁은 단일 시스템 내에서의 경쟁이다. 상호의존의 세계에서 디커플링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다만, 상대의 취약성을 공략함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달성하고자 하는 패권 경쟁, 세력권 경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투쟁이 걸려 있는 제로섬 게임처럼, 선택이 불가피한 이분법적 대결인 것처럼 세상을 보는 것은 유의해야 한다. 잘못된 상황인식은 그릇된 정책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신냉전 프레임에 갇히면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고, 안 그래도 협소해지고 있는 한국 외교의 자율적 공간을 우리 스스로 더욱 좁힐 위험이 있다. 많은 나라들이 미·중 경쟁의 압력 속에서도 국익을 확보하기 위해 기민하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신냉전 비유를 “지적 게으름”의 소산이라고 일갈한 전 싱가포르 외무차관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자기충족적 덫이 될 위험이 있는 신냉전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우리 외교의 출발점이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욱일기를 욱일기라 부르지 못하고…잔뜩 찌푸렸던 지난 29일. 부산 해군 작전기지 하늘 아래 펄럭이는 '욱일기'의 붉은 태양무늬는 퍽 선명했습니다. 욱일기를 선미에 게양한 군함은 해상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함. 한국이 31일부터 주최하는 다국적 해양차단 훈련 '이스턴 앤데버23'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자위함대 중 한 척이었지요. 이번 훈련에 일본 자위함대가 참가를 결정하면서 일찌감치 국내에서는 일본 함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입항할 것인지가 관심이었습니다. 욱일기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직전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2018년 11월 한국 해군 주최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를 초청하면서 일장기만 게양할 것을 권고했으나 일본이 욱일기 게양을 고집하는 바람에 무산된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이자 한국을 침탈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1870년 일본제국 육군기로 처음 사용된 욱일기는 1889년 해군기로 채택된 이래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탐욕적 제국주의 전선 곳곳에서 휘날렸습니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제국군이 해체되면서 내려졌으나 1954년 자위대 창설과 함께 부활됐고, 과거 패권주의 망령이 깃든 일본 극우세력이 지금도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제 강점기 역사를 부정하며 일본 군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것이 현실. 역시 1945년 패망한 독일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이후 영구적으로 폐기한 것과 사뭇 비교됩니다. 이런 역사를 한국 정부, 특히 국방부 역시 알 법도 한데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매우 의아했습니다. "(자위함기와 욱일기 두 깃발이) 형상은 비슷하지만 자세하게 놓고 보면 차이가 있다."(이종섭 국방부장관. 2022년 10월3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자위함기와 욱일기는 조금의 차이는 있긴 하다."(전하규 국방부 대변인. 2023년 5월25일. 국방부 정례브리핑) 주무 장관과 대변인 입에서 나온 이 말들은 7개월 간격이 있지만 일관됩니다. 자위함기와 욱일기는 다르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겁니다. 문재인 정부 때 자위함에 매달려 있던 깃발이 윤석열 정부 때라고 달라지지는 않았을진대, 국내 일부 언론도 '욱일기와 흡사한 자위함기', '욱일기 모양의 자위함기'라 따라 부르는 상황. 그렇다면, 일본도 그럴까.  자위함대의 이번 방한을 보도한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산케이> 등 일본의 5대 일간지는 하나같이 "자위함대, '욱일기' 게양하고 부산 입항"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일본 스스로 '너희 부산항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욱일기'라고 자인한 것을 한국 정부만 욱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참 요상한 풍경입니다. 그 덕에 '외국항에 입항한 함정은 소속 국가 국기와 군대 깃발을 다는 것이 국제적 통용사항'이라는 나름 합리적 설명은 참 쑥스럽게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 얼어붙었던 한일관계가 급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자랑이라면, 국제적 관례임을 들어 한국 국민이 너그러이 양해해 달라는 말을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이끌어 냈다면 어땠을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노력 조차 없었으니 '굴욕외교', '호구외교'라고 야단을 맞는 겁니다. 이런 지적까지 야당의 정치적 호도라며 외면하면 답이 없겠습니다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5월30일치 <요미우리신문>의 '해자함 욱일기 들고 부산으로…정부 방침 전환 6년만'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이번 입항으로 욱일기 문제는 사실상 해소된 셈(今回の入港で旭日旗を巡る問題は事實上解消されたことになり)"이라고 보도했으니. 이후 더욱 노골화 될 욱일기의 진격을, 우리 정부는 또 어찌 감당할 지 참 걱정입니다. 최기철 법조기자·미디어토마토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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