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며 자기수양에 힘써야 한다
(제자백가로 나를 배우다⑩)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부: 《여씨춘추》, 사상의 용광로
입력 : 2022-05-03 06:00:00 수정 : 2022-05-03 06:00:00
《여씨춘추》에서 ‘여씨’란 여불위(呂不韋)라는 인물을 가리킨다. 위나라 출신인 여불위는 전국시대 말 큰 상인이었다. 물건을 물건이 값이 쌀 때 많이 사 두었다가 값이 오르면 되파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었다.
 
여불위는 당시 당시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 오늘날 중국 베이징 허베이(湖北)성 남쪽 지역에 위치)을 중심으로 상업을 벌이다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秦)나라의 서얼 공자 영이인[전 281~전 247, 훗날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을 만난다.
 
영이인은 진나라 소양왕의 아들이자 태자인 안국군의 서얼 공자였다. 태자 안국군은 정실인 화양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었고 후궁들과의 사이에 서얼 공자를 20여 명이나 낳았다. 영이인은 서얼 공자 이십여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어 왕위 쟁탈전에 달려들어 볼 처지도 안 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여불위는 영이인을 보고 대상인답게 “진귀한 화물이니 사둘 가치가 있다[珍貨可居]”라고 외쳤다고 사마천은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서 전한다.
 
여불위는 그다지 승률이 높아 보이지 않는 영이인에게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둔다. 천금을 들여 영이인에게 500금을 주며 조나라의 귀족 왕족들과의 사교에 쓰도록 하고 500금으로는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에게 보낼 선물을 잔뜩 마련한다.
 
여불위는 조나라에 인질로 가있는 영이인이 아주 오래 전부터 화양 부인을 존경해왔다며 그를 화양부인의 양아들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화양부인은 여불위의 제안을 받아들여 안국군에게 조나라에 인질로 가있는 영이인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을 것이니 그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을 한다. 안국군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화양부인의 존재의 불안감에서 나온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조나라에 인질로 가있는 영이인을 태자로 삼는 데 동의한다. 소양왕 사후 왕위에 오른 안국군 진효문왕(秦孝文王) 영주는 즉위 뒤 얼마 못 있어 사망하고 화양부인의 양아들이 된 뒤 ‘자초(子楚, 화양부인이 초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라고 이름을 바꾼 영이인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여불위가 그린 큰 그림 덕분에 왕위에 오른 영이인 장양왕(莊襄王)은 여불위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를 중부(仲父, 큰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승상으로 삼았다.
 
여불위는 진나라 최고의 재상인 상국(相國)으로 있으면서 진나라 바깥까지 포함해 전국에서 문객(門客)들을 3000여명 거느렸다. 학식과 재주가 있다면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묻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준 것이다. 
 
여불위의 문객 3000명 가운데는 당 가운데는 당시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논쟁으로 논리가 정연하던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종횡가(縱橫家), 명가(名家), 법가(法家)의 쟁쟁한 문사들이 두루 모여 있었다. 훗날 진나라 시황제의 책사로 전국 통일을 돕는 이사(李斯)도 여불위의 문객으로 있었다.
 
여불위는 이 문객 3000여 명에게 각자 자신이 신봉하는 최고의 논리를 글로 써내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저작이, 줄여서 ‘여람(呂覽)’이라고도 불리는 《여씨춘추(呂氏春秋)》로서, 기원전 241년의 일이었다, 《여씨춘추》는 고대 중국의 방대한 고문헌들 가운데서 책이 만들어진 성서(成書) 시기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유일한 저작이다.
 
2000년 묵은 막장 드라마
 
여불위가 조나라에서 인질로 와 있던 서얼 공자 영이인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가 영이인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주연을 베풀었다. 여불위가 영이인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 여불위의 여인이던 무희(舞姬, 춤추는 여인이라는 뜻) 조희(趙姬)가 춤도 추고 술도 따랐다. 영이인은 조희에게 푹 빠졌다. 영이인은 여불위에게 저 여인을 내게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영이인에게 이미 천금을 투자하고 있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여불위열전>에 따르면 조희는 그때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고 영이인에게 간 뒤 영이인의 아이인 것처럼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을 낳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기록만 읽으면 훗날 전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이 되는 영정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여불위라고 여기게끔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설은 한나라의 유학자들이 분서갱유(焚書坑儒, 법 관련 서적과 실용서적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해서 살해한 진시황 때의 사상 탄압)라는 잔혹한 탄압을 당한 보복으로 진시황과 진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 꾸며낸 막장 드라마를 사마천이 철저한 사료 비판 없이 자신의 《사기》에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 유학자들은 진시황의 전국 통일의 공로를 인정해줄 아량이 없었고 증오만 있었기 때문에 진 나라의 전국 통일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여씨춘추》라는 귀중한 문헌조차 전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먼지덩이 속에 처박히도록 만들어서, 《여씨춘추》는 청나라의 문인 완원(阮元)이 1789년, 읽을 수 있도록 교정을 본 교감 본 《여씨춘추》를 정리해 낼 때까지 1500년 동안 전혀 학계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편집자가 없을 수 없었던 문헌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이라는 복합적 형식으로 구성된 《여씨춘추(呂氏春秋)》는 편집자가 없을 수 없어 보이는 고대 문헌이다. 비록 여불위의 주도로 문장이 모아졌지만 상인으로서 평생 상업에만 종사했던 여불위를 편집자로 보기는 어렵다.
 
‘십이기(十二紀)’라는 문헌 배열 방식 또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데 ‘십이기(十二紀)’란 춘하추동 네 계절을 각각 초입, 절정, 늦은 시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열두 편으로 분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봄을 초봄, 성춘(盛春, 봄의 절정기), 늦봄으로 나누고, 여름을 초여름, 한여름, 늦여름으로 나누고, 가을을 초가을, 한가을,  늦가을로 나누고, 겨울을 초겨울, 한겨울, 늦겨울로 나눠 사계절 열두 마디, 열두 시기로 나눈 것이다.
 
천자와 제후 등 군주들이 하는 일을 하늘이 봄에 천지만물의 생명을 살리고 가을에 모든 잎을 떨구어 죽게 만든다는 큰 흐름을 따라서, 씨를 뿌리고 생명을 살리고 사면하고 석방하는 일들에 관한 글들은 봄쪽에 배치하고, 형벌을 내리거나 처형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일에 관한 글들은 가을 쪽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글을 편집한 것이 ‘십이기(十二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을 벌이던 제자백가 각 학파의 주장이 고도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고루 배열돼 있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음량가의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담은 글들을 ‘춘생추살(春生秋殺, 봄에는 천지가 만물을 소생시키고, 가을에는 천지가 만물을 조락하게 한다)’이라는 자연의 흐름을 대의로 삼아 글을 배치한다는 것은, 당시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백가쟁명의 논리를 다 꿰고 있는 논리정연한 대학자가 아니라면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여불위의 식객들 가운데는 이 정도로 제자백가에 대해 정통하고 해박한 몇몇 사람이 이 서물(書物)의 편집 작업을 맡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순백색의 여우는 한 마리도 없지만”
 
‘《여씨춘추》 편집위원회’(이문헌의 편집에 참석한 알려지지 않은 사상가들을 이렇게 편의상 부르기로 한다)의 사상가들은 산더미 같은 글들 가운데 12기(紀)에 사계절로 나눠 배열할 글들을 뽑은 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글더미에서 좀 포괄적인 논의를 담은 글들은 ‘8람(覽)’에 배열했을 것이고, 남은 글더미에서 각 학파에서 빠뜨릴 수 없다는 주요 주장들을 모아서 ‘6론(論)’에 배치했을 것이다. 이상의 서술은 현존하는 《여씨춘추》를 바탕으로 이 문서의 편집과정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해 본 것이다. 그러나 《여씨춘추》 편집위원회의 사상가들은 《여씨춘추》 속에 자신들의 편집 원칙에 해당한다고 보이는 구절들을 숨겨뒀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순백의 여우는 존재하지 않지만, 순백의 여우가죽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마리의 여우들에서 얻은 흰 털로 만든 것입니다. (《呂氏春秋》)
 
여우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무게가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서 전국시대의 일화 속에서 귀한 선물이나 뇌물로 많이 등장한다. 제나라의 맹상군이 진소왕에게 갈 때 선물 겸 뇌물로 활용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도 바로 흰 여우 갖옷이었다. 이 중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흰 여우 갖옷’인데, 순백색의 여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은 흰 털로 이뤄져 있는데, 여우 여러 마리의 가죽에서 겨드랑이의 흰 털 가죽만을 두루 모아야 ‘흰색 여우 갖옷’ 한 벌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위 문장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우 여러 마리의 가죽에서 겨드랑이의 흰 털 가죽만을 두루 모아야 한 벌의 흰색 여우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들을 배척하지 않고 최대한 폭넓게 포용하려 한《여씨춘추》의 가장 중요한 편집 원칙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우리가 꼭 한 번 곱씹어볼 만한 의미심장한 비유다.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이 시기에 등장한 사상가는 모두 189가이고, 이들이 남긴 저작은 모두 4324편에 이른다. 《여씨춘추》는 이들의 사상을 모두 종합하고자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씨춘추》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이 태어나는 것은 그늘과 볕 가운데 하나의 기운만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만물이 자라나는 것은 한 종류의 사물에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한 종류의 공로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凡生非一氣之化也, 長非一物之任也, 成非一形之功也。<明理>)” 만물 모두 쓰일 데가 있다. 큰 일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단일한 무엇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모든 것의 가능성을 다 동원해야 한다.
 
무조건 다양한 만물을 동원하는 것은 아니다. 요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임금 자리를 그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임금에게 물려준 일과, 순임금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임금 자리를 그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우임금에게 물려준 일은 천하에 지극히 공적인 행위이다.(堯有子十人, 不與其子而授舜; 舜有子九人, 不與其子而授禹; 至公也. 《呂氏春秋》<孟春ㆍ去私>)
 
‘공변됨[공(公)]’의 가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씨춘추》 편집위원회의 사상가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학파의 사상만을 고집하지 않고 각 학파의 학설을 두루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이 구절처럼 ‘공변됨[公]’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여씨춘추》의 편집자들은 도가, 묵가, 음양가 사상가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던 당시의 ‘천하사상’을 가져와 ‘공변됨’에 대해 한번 더 강조했다.
 
천하는 군주 제왕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온 천하 만민의 천하다. 음양의 조화는 단지 하나의 사물만 길러주는 것이 아니다. 단 이슬과 때맞춰 내리는 비[甘露時雨]는 단지 하나의 사물을 위해서만 사사로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만백성의 군주는 단지 한 사람을 총애하는 것이 아니다. (天下非一人之天下也, 天下之天下也. 陰陽之和, 不長一類; 甘露時雨, 不私一物; 萬民之主, 不阿一人. 《呂氏春秋》<孟春紀ㆍ貴公>)
 
《여씨춘추》의 편집자들은 유가, 도가, 묵가, 병가 등 모든 학파들이 똑같이 빠뜨리지 않고 발전시켜 오던 개념인 ‘수신(修身, 자기 몸을 닦음)’ 사상의 강조를 통해 전국시대의 분열상을 극복할 통일 군주가 등장하더라도 수신을 통해 만인을 위한 다스림을 펼 것을 기대했다.
 
《여씨춘추》는 제자백가 시대 한 학파의 사상을 고집하지 않고 유가, 도가, 묵가, 병가 등의 공통 개념인 '수신(修身, 자기 몸을 닦음)' 사상을 강조했다. 사진은 지난 2019년 이슬람사원에서 한국 불교계와 파키스탄 이슬람교계가 종교 간 화합과 평화를 다짐하던 모습. (사진=연합뉴스)
 
“배움에 앞다투어 나서라”
 
《여씨춘추》에도 <배움을 권하노라[권학(勸學)]>라는 제목의 글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글은 순자의 후학의 글로 보이며, 《순자》의 <권학>편과 내용이 많이 중복된다. 여기서 이 글에 대해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으나, 이 글에서 다음 구절은 마음에 새겨둘 만하다.
 
완전한 인격을 갖춘 위대한 지도자[성인(聖人)]는 배움에 앞다퉈 나서는 데서 생겨난다. 배움에 앞다투어 나서지 않으면서 선비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이름난 사람이 된 사람은 없다. (聖人生於疾學. 不疾學而能爲魁士名人者《呂氏春秋》<勸學>
 
“배움에 앞다투어 나서라[질학(疾學)]”란 어떻게 하란 얘기인가?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나 성과가 나오면 앞다투어 부지런히 챙겨보고 업데이트 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자세나 태도가 없다면 자기 분야에 대해 ‘질학(疾學)’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프론티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동향을 알고 자신도 프론티어에 서서 공부하기 위해 따라 잡으려고 애쓰는 일은 ‘자발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질학(疾學)’의 비밀은 자발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총리이던 조르주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클레망소의 어법을 흉내내자면, 우리 시대의 우리 공동체의 과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좌파나 우파 어느 한쪽 진영에만 맡겨둘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잡파(雜派)’라고 주장한다.
 
《여씨춘추》와 같이 자기 동시대의 모든 사상과 모든 사람의 요구와 욕망을 종합하겠다는 정도의 기세와 야망이 있어야 우리 시대의 문제와 과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도의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라야, 배움에 앞다투어 나서는 질학(疾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표=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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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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