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는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지역입니다. 그 중에서도 타지키스탄은 이름조차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악지대와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품은 이 나라는 젊은 인구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한류에 대한 호감까지 더해져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 기업들엔 미지의 시장이지만 그만큼 선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매력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 베일에 싸인 타지키스탄의 진짜 얼굴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편집자 주)
찬란한 고대 유산…페르시아 뿌리와 '왕관'의 의미
타지크 민족의 이야기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들은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이란계 정착민인 소그드인과 박트리아인의 후예로 여겨집니다. 주변의 유목민족들 속에서도 농경과 상업, 그리고 페르시아 문화를 꽃피우며 중앙아시아의 문화적·상업적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타지크어에서 'Taj(Toj)'는 왕관을 뜻하며, 이는 단순한 이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들은 광활한 지역에서 고도의 문명과 학문을 주도했으며,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왕관을 쓴 민족'으로 인식하는 자부심의 원천입니다.
타지크 민족이 사용하는 타지크어는 페르시아어의 동부 방언에서 유래한 언어로, 이는 이란계 문화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들의 언어는 고대 이란어의 유산을 21세기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타지키스탄 지도. (이미지=네이션스온라인 프로젝트)
타지크 문명 황금기…사만 왕조의 부흥
타지크 역사의 가장 빛나는 절정은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 자리했던 사만 왕조(819~999년)입니다. 아바스 왕조의 중앙집권이 약화된 틈을 타 등장한 이 왕조는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 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사만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사실상 독립을 이룬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사마니(이스마일 소모니)'는 타지키스탄의 국부로 추앙받습니다.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 중앙에 우뚝 선 그의 동상과 현재 사용되는 화폐단위 소모니는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국가적 상징입니다.
사만 왕조의 수도였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문명 전체의 지적 중심지였습니다. 이 시기에 루다키, 피르다우시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이 등장해 신(新) 페르시아 문학을 부흥시켰습니다. 이러한 학문적·예술적 번영은 후대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왕조의 통치자들에게까지도 깊은 문화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오늘날 타지키스탄 공화국의 인구는 약 1100만명으로 많지는 않지만, 타지크 민족은 사만 왕조의 영토였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중심의 우즈베키스탄, 다리어 사용 지역인 아프가니스탄, 중국의 타슈쿠르간 지역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거주하며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교류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두샨베 중앙 광장에 세워진 타지키스탄 국부 이스마일 소모니 동상. (사진=타지키스탄 정부 관광청)
20세기 격변…부하라 토후국 몰락과 볼셰비키 영향
18세기 후반, 타지크인들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은 부하라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이 토후국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학문의 보루였지만,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정책에 굴복해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중앙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1920년 러시아의 붉은 군대는 부하라를 침공해 토후국을 멸망시키고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1924년 소련은 '민족 경계 획정'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했습니다. 이 정책은 범튀르크주의나 범이슬람주의 같은 체제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타지크인들은 처음에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 내 자치주로 편입되는 불이익을 겪었으며, 1929년에야 독립된 타지크 SSR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타지크 문화의 심장인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에 포함되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소련 정권은 타지크 SSR을 제국의 목화 생산 기지로 특화했습니다. '콜호스'라 불리는 급속한 농업 집단화와 목화 단작 재배 강요는 타지크 농민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적 관습을 파괴했으며, 자급자족 기반을 붕괴시키고 토양 황폐화를 야기하는 등 장기적인 경제적·환경적 취약성을 남겼습니다. 타지크인들은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 속에서도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이스마일 소모니 초상과 대통령궁이 그려진 100소모니 지폐. (사진=타지키스탄 중앙은행)
독립과 재건…내전 넘어 미래를 향해
소련 시대 70여년을 거친 후, 1991년 9월9일 타지크 민족은 마침내 타지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불행히도 독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타지키스탄은 1992년부터 약 1995년까지 참혹한 내전을 겪었습니다. 타지키스탄은 중앙아시아 독립국 중 유일하게 내전을 겪은 국가입니다.
이 내전은 지역적 파벌, 소련 시대 엘리트 세력, 그리고 이슬람 부흥 세력 간의 복잡한 권력투쟁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 분쟁은 1997년 러시아와 유엔의 중재 하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공식적으로 종식됐습니다.
내전 이후 에모말리 라흐몬 정권은 국가의 안정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타지키스탄은 여전히 경제 발전과 빈곤 퇴치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현재 타지키스탄의 많은 국민들이 러시아, 한국 등으로 이주 노동을 떠나 본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으며, 국가는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해 수력발전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로그운 댐 건설은 타지키스탄이 에너지 강국으로 도약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타지크 민족은 사만 왕조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자부심, 그리고 내전의 시련을 이겨낸 강인함을 유산으로 삼아, '왕관의 민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밝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보보예프 루스탐존 타지키스탄 오리욘은행 한국지사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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