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오세윤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신도비 앞면
[뉴스토마토 박재연 기자]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사찰 '남산사'의 정원석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신도비(神道碑)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6일 고고학 연구자인 박홍국 위덕대 교수는 "경주시 사찰 '남산사'의 정원석이 신라 신도비의 일부"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신도비"라고 밝혔다.
신도비의 첫 발견자인 남산사 주지 선오 스님은 지난 20일 정원석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를 발견해 박 교수에게 글자 해독과 고증을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오 스님은 박 교수에게 비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경주시에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를 했다고 전했다.
정원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찬지비'의 오른쪽 윗부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1963년 11월에 발견된 찬지비는 머릿돌인 이수 파편 1점과 비석 파편 2점만이 발견됐는데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오른쪽 일부가 남산사 정원석이었다.
박 교수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수 파편 크기를 토대로 비석이 파손되기 전 크기가 가로 70∼80㎝, 세로 160∼180㎝였을 것으로 추산했다. 또 정교하게 조각한 이수에 걸맞는 거북 모양 받침돌인 귀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이어 박 교수는 비석 한쪽 면에 남아있는 세로 1.8∼2.8㎝ 크기의 글자 해독에 나서 신라사에 정통한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함께 전체 100자 중 80자를 판독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오세윤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신도비 뒷면
판독에 따르면, 가장 오른쪽에는 '공순아찬공신도지비'(恭順阿?公神道之碑)라는 글자가 있으며 '공순'은 비석 주인 이름을 가리키며, '아찬'은 신라 17등 관계(官階) 중 6등에 해당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이에 따라 박 교수는 비석 이름을 '공순아찬신도비'이라 명명했다.
박 교수는 "경주박물관 찬지비는 중요한 금석문(金石文)임에도 판독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연구자들이 작성한 논고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며 "찬지비와 재질, 서체가 같은 새로운 비편(碑片)을 통해 실체를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박 교수는 비석의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로 7행 '천령군'(天嶺郡)'을 꼽았다. 천령군이란 경남 함양의 옛 이름으로 757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천령군이라는 글자가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된 첫 사례로, 비석은 757년 이후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며 "이수를 또 다른 신라 비석인 무열왕릉비나 800년 무렵 완성된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 이수와 비교하면 800년 이전 작품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실물 신도비는 조선 태조 건원릉 신도비였는데, 신라 신도비가 발견됐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공순아찬신도비'가 신라 신도비라는 증거는 다른 문장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함께 판독에 참여했던 이영호 경북대 교수는 비석의 내용 중 '신라국지김씨'(新羅國之金氏)와 '아김씨'(我金氏)라는 구절에 주목했다. 이 교수는 각각 '신라국의 김씨'와 '우리 김씨'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태종대왕지손자'(太宗大王之孫者)이란 구절은 전설의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 아들 '소호'(少昊)와 '태종대왕의 손자'를 뜻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교수는 "역사서에서 공순이라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며 "공순이 태종 무열왕 손자인지, 아니면 공순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무열왕 손자인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씨 관련 구절에서 신라시대 김씨들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다"며 "아찬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지만, 상당히 큰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공순은 진골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편 비문의 서체는 정자체 '해서', 흘림체 '초서'가 쓰였으며 가장 많이 쓰인 서체는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행서'다.
박 교수는 비석 서체가 신라 명필로 잘 알려진 김생의 서체라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유명 서예가 왕희지의 서체와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글씨에서 필력, 해학, 자유분방함 속에 기이한 품격이 느껴진다"며 "김생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는 낭공대사비와 흡사한 글자가 많다"고 전했다.
동시에 "이 비석은 동일한 글자를 일부러 다르게 쓸 정도로 예술성이 있다"며 "8세기 이전 비석 중에 해서, 행서, 초서를 함께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며 '공순아찬신도비'의 의의를 강조했다.
박재연 기자 damgom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