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승재 기자]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과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벌써부터 피해 당사자와 일본 양측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포용적 타협안을 수립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 보다 속도에만 몰입하다보면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와 같은 상황을 재연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8일 외교부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을 찾는 민관협의회는 지난 4일 출범과 동시에 지난 첫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에는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을 중심으로 피해자 지원단체 및 법률대리인, 학계 전문가와 언론·경제계 인사 등 12명이 참석했다.
조 차관은 첫 회의에서 "민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한 논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의미가 있다"면서 "오늘과 같은 대화와 소통의 자리가 문제 해결의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재까지 나온 협의회의 최우선 목표는 오는 8~9월로 예상되는 일본 전범기업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매각) 대법원 판결에 따른 실질적 절차가 시작되기 전, 피해자 측이 수용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을 마련해 그간 경색됐던 한일관계 회복의 첫 단추를 마련하는 것이다.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에 대한 시간이 촉박한 만큼, 협의회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9건, 고등법원 계류 6건 등 총 67건의 강제 징용 관련 소송과, 아직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에 대해선 추후에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피해자와 일본,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협의회가 적절한 해법을 도출하기에는 여러 난항이 예상된다.
우선 전범기업인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후지코시 등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한 강제징용 소송 피해자 측은 지난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지속적으로 이들 일본 기업과의 직접적인 협상을 원하고 있다. 피해자 측은 민관협의회 첫 회의날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역시 일본 기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이 만나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기업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 한국 대법원 판결 직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인 책임이 끝났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한국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 국제사회에 '한국은 법이 안 통하는 나라'로 선전하겠다는 등 어깃장을 놓고 있다.
일본 측의 이런 입장은 한국 외교부가 세운 '긴장감과 속도감을 가지면서 당사자와 각계각층 의견이 들어간 타협안 마련'이라는 협상 원칙이 과연 먹힐 것이냐라는 의문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 외교부가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해 정부가 안을 만들 것"이라 밝혔지만, 형식적인 의견 수렴만 받고 피해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정부안을 낸다면 지난 2015년 위안부 합의처럼 피해자를 배제한 양국간 합의로 되풀이될 가능성도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지난 5일 기자 간담회에서 "현금화 문제 해결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씀하신 사항을 포함해 한일관계 사안도 당연히 고려를 해야 한다"고 말한 걸 보면 현금화 문제가 현실로 직면하기 전 정부안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닌 대법원에서 판결로 확정된 손해배상 문제를 강제징용 피해자 외 다른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겠다는 외교부의 입장도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 실장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대폭 수렴해줄지, 형식적인 절차만 거칠지 등은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제일 우려되는 부분은 정부가 현금화를 멈추기 위해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하는데 꼭 이 때문에 논의를 집중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8월까지 안을 만들겠다고 얘기가 나오는데 서둘러서 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의 강제징용 피해자 총 14명을 대리하고 있는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도 "정부가 급하게 현금화를 막는데 중점을 두고 불합리한 타협안을 낸다면, 피해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피해자 측은 대법원 확정 판결과 관련해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이고 향후 외교적 노력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지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 민관협의회에 참석하는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단과 지원단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승재 기자 tmdwo3285@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