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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⑫)'통킹만' 사건
입력 : 2022-10-14 오후 5:11:26
한참 힘겹게 달려가고 있는데 집을 수리하느라 시멘트 반죽을 하던 두 사내가 건너편에서 부른다. 쉬었다 갈 핑계를 찾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 유모차를 한편에 세워두고 건너갔다. 자기들이 마시던 차를 마시라고 권하더니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을 보더니 안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들고 나온다. 나는 얼른 “깜언!”하고 받아 마셨다. ‘흐르는 쌀국수’가 목젖을 타고 넘어가 낙차가 크게 위장으로 떨어져서 생기를 돌게 만든다. 이번엔 다른 사내가 바나나 한 손을 들고 나와 내 손에 쥐어준다. 말이 안 통해 조금 앉았다 일어섰다. 
 
건너와 조금 달리려니 어린아이를 뒤에 태운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평택에서 10년을 살다 왔다며 그 앞 음식점에서 음료수라도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는다. 나는 바로 전에 맥주를 마시며 쉬어서 시간이 지체 될 것을 염려되어 조헌정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라며 자리를 떴다.
 
'띵감'은 우리말의 정감(情感)이다. 베트남에 “법은 없어도 살지만 '띵감'이 없으면 못 산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혼잡하고 소음 많고 먼지 많은 거리에서 '띵감'을 느끼는 재미가 솔솔하다. 이곳에서 일상처럼 정을 표현하고 정을 주고받아야 한다. 상대방의 나이나 직업, 결혼 여부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는 것은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관심이며 '띵감'의 표현이다.
 
'띵감'과 함께 베트남인의 장점은 낙천성이다. 이것은 화합해서 일치하기에 좋은 덕성이다. 이들은 작은 마을공동체에서 옹기종기 살다 보니 서로 부딪치는 일도 많아서 갈등을 풀지 않고 가슴에 품고는 함께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금방 싸우고 금방 화해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쉬지 않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이혼 후에도 처갓집 경조사에 참여한다든지 이혼 후에도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탄호아'를 지나면서부터는 바다가 가깝다.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 그리고 하이난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통킹만'이라고 부른다. 통킨만은 북베트남 해상 전력의 요충지이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해서 군사, 경제적 원조를 엄청나게 제공했음에도 새는 항아리에 물 붓기였다. 상황은 미국의 애당초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직접 개입이었다. 개입을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늘 그렇듯이 명분은 필요하면 만들면 되었다. 그건 미국이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통킹만'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미 해군은 북베트남의 영해인 17도 선 북방으로 '통킹만' 연안을 계속 도발적인 순찰하였다. 갑작스런 암살로 케네디가 서거하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 대통령은 처음에는 베트남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을 순찰 중이던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 3척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10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미 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부상자는 없었다.
 
이틀 뒤 미국은 '매독스호' 지원을 위해 추가 파견한 '터너 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미국 내에서 전쟁 반대 분위기가 확산되던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8월 4일 두 번째 교전에 대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미군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통킹만 사건' 자체가 미국 자작극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란 조작된 명분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1975년까지 베트남을 온통 피의 광풍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었다.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베트남에 미군을 증파했고 1968년에는 미군 숫자가 50만을 넘었다.
 
스페인은 나폴레옹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 식민지를 포기하는 상황이었으나 아직 많은 부를 안겨주는 쿠바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쿠바의 설탕은 모두 미국이 사들이고 있었다. 쿠바는 어느새 미국으로서 경제적 및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 미국은 쿠바 내의 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함을 보낸다.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함 (USS Maine)에서 갑자기 화염과 함께 폭발음이 나더니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스페인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미국은 쾌재를 불렀다. 언론들은 스페인의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대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원하는 여론이 다수였다. 2달 뒤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스페인에 준비된 미국이 공격을 시작하며 스페인-미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스페인 함대는 전멸했다. 스페인은 식민지였던 쿠바는 물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넘기고 간신히 전쟁을 끝냈다. 쿠바는 카스트로가 해방시키기 전까지 미국인들의 도박, 매춘 관광지로 전락했다.
 
존슨은 국민 지지가 낮은 것을 만회하려고 '통킹만 사건' 조작하여 월남 파병 이끌어내고 전쟁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베트남 인민이 비참하게 피 흘렸는가? 부시는 낮은 지지율에 이라크 전을 조작하였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국민 지지율 낮은 대통령이 무슨 짓을 벌일지 심히 염려된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12일차인 지난 12일 베트남의 한 거리에서 만난 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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