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2022년 9월 2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의 집인 광주 광산구 우산동 한 아파트를 찾아 이씨와 대화를 나누고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풀어야 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요? 그건 알렉산더 대왕 정도 되는 인물이거나 또는 전설 속에서 가능한 얘깁니다.
일제 강제동원(‘강제징용’은 강제성은 담고 있으나 불법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동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문제는 현재 한일관계 전반에 얽혀 있는 복잡한 사안입니다.
윤석열정부의 한일관계 해결 방법론은 ‘일괄타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6월 대선 출마 선언 때부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한일 간의 안보협력이나 경제·무역 문제 이런 현안들을 전부 다 같이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며 ‘일괄타결론’을 내세웠습니다. 단 한 칼로 매듭을 끊어버리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시원하게 들립니다.
‘일괄타결론’은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익숙해진 말입니다. 그는 야당 시절부터 핵 문제 등 북한 문제들을 미국과 북한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윤 대통령, 후보 때부터 한일관계 현안 일괄타결 주장
북한 문제는 ‘북미관계 개선-수교’라는 핵심 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매개로 한 일괄타결 방법론이 적실성이 있었습니다. 반면, 한일관계 현안들은 아베 전 총리 등 일본측에서 관계없는 사안들을 연계시켜 놓았으나 과거사 문제, 경제 문제, 한미일 군사협력 등등 각각 개별적인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일괄타결 접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일제 강점 피해국인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과거사를 다른 현안들과 뒤섞어서 한 테이블에 올려야 할까요?
국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판결금을 대신 지급하는 ‘제3자 대위변제’안을 내놓은 윤석열정부는 일본 측과 외교부 국장급, 차관급 회담에서 타결점을 찾지 못하자, 단계를 높여 장관급 회담을 거듭하고 있으나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이 과정에서 박진 외교장관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 통절한 반성과 사과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일본이 이를 포괄적으로 계승할 경우 이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박진 장관은 지난 19일로 일본 하야시 요시마사 외상과 회담한 뒤 “일본 측에 성의있는 호응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본인 스스로 '결단과 소신의 정치인'이라고 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외교라인 협의로는 결론을 낼 수 없다'는 뜻이니, 한마디로 길을 잃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강제동원 등 한일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오는 5월 일본에서 열리는 G7정상회의에 참석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습니다. 취임 이후 처음하는 3.1절 기념사에서 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협상은, 외교는 시한을 정해놓고 하는 쪽이 이기기 어려운 게임 아닙니까?
강제동원 문제는 그 문제대로 논의하고,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그 일정대로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일간 과거사 문제가 첨예하지만, 그럼에도 한미일이 동해에서 북한 미사일 방어훈련을 진행하듯 말입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한일관계 사안 전반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던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전범기업들,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는 사과·배상
일제 강제동원 문제 타결을 위해서는 두 가지 마지노선이 지켜져야 합니다. 우선 일본 전범기업들의 직접 사과와 배상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이 완고하나, 중국에는 달랐습니다.
중국은 1972년에 자체적으로 배상청구권을 포기했으나, 미쓰비시는 2016년에 사죄와 함께 1인당 1만5000달러를 배상금으로 지급했습니다. 카지마 건설은 희생자 위령비 건립비용 5억엔을 기탁했으며 니시마츠 건설은 소송 당사자뿐 아니라 피해자 전원에게 배상했습니다.
사과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계승' 선언 등 형식적인 선언으로는 피해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국 대법원에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의 배상확정 판결을 이끌어낸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99) 할아버지는 외교부 당국자들에게 “일본의 책임 있는 사과”를 요구했고, 그 자녀들도 “오랜 시간 고생하고 노력한 아버지의 판결을 이렇게 팔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한국 자체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는 ‘Agree to Disagree’(견해차 인정)로 남겨놓으면서 계속 일본의 변화를 요구하면 될 일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