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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재의 미디어 비평)공개되지 않은 유서를 마구 공개하는 언론
입력 : 2023-03-16 오전 6:00:00
지난주 금요일(10일) 오전 야당 대표의 전 비서실장이자 직업공무원이던 전 아무개씨가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언론에 전해졌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포털과 방송에는 고인의 ‘유서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거의 모든 주요 조간신문들도 1면 톱에 ‘유서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뽑아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를 찬찬히 보니, 고인이 수첩 6페이지 분량을 남겼다는 유서는 유족이 공개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경찰도 유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실제 보도된 거의 모든 기사는 ‘~라는 내용이 (유서에)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전해졌다)’라는 식입니다. 어떤 기자도 유서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그저 누군가에게서 ‘전해 듣고’ 쓴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만.
 
'유족이 공개 거부한 유서를 언론이 왜 보도했을까' 라는 질문은 정치적이어서 접어두겠습니다. 정치인인 야당 대표가 관련되어있고, 그보다 더 정치적인 검찰 수사가 얽혀있으니, 자살 동기를 확인해 줄지도 모르는 ‘유서 내용의 일부’를 언론이 공개한 이유는 그보다 훨씬 더 정치적일 것입니다. 
 
대신 정치적이지 않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어쩌면 언론에게 가장 중요할지 모를 질문을 던져봅니다. 첫째, 유명인·공인·정치적으로 관심을 끄는 인물의 자살의 경우라면 언론이 자살동기를 파헤치기 위해 유족이 반대하더라도 유서 내용을 보도해도 되는가? 둘째, 유서의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보도하는 것은 죽음의 동기에 대한 ‘종합적’ 진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 셋째, 기자가 직접 확인하지 않고 단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인 ‘사실보도’에 부합하는가? 
 
이것은 중대하고 심각한 언론윤리의 문제입니다. 진영논리나 정파주의적 관점의 논쟁이 아닙니다. 언론은 유명인의 자살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미 여러 번 이런 비윤리적 취재보도로  호된 비판과 질책을 받은 바 있습니다. 2년여전 한 유명 개그우먼 자살 사건 당시 <조선일보>가 유족과 경찰의 유서공개 불가 입장을 무시하고 유서를 ‘단독’ 보도했을 때 언론계에서는 ‘언론윤리 팽개친 보도,’ ‘언론 스스로 신뢰를 추락시키는 천박한 보도’라는 매서운 비판이 일었습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경고조치도 내렸습니다.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에는 자살 보도시 ‘고인의 인격과 유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유서와 관련된 사항을 보도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고인이 유명인이든 아니든, 유족이 공개하길 반대하는 유서라면 보도를 자제하는 것이 언론계 스스로 약속한 준칙이고 윤리입니다. 긴 글 중에서 일부만을 잘라 옮기면 전체적 맥락과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기자가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을 마치 확인된 사실인 양 대서특필 보도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불과 몇 개월 전 이태원 참사 당시, ‘유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고인의 이름조차도 공개해서는 안되고, 이름을 공개하면 ‘패륜’이라고까지 했던 언론입니다. 그랬던 언론이 지금은 유족이 반대하는 유서를, 그것도 ‘전해들은 일부’ 내용만을 대대적으로 보도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정치적 혹은 상업적 이해관계 앞에서 언론에게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일까요?
 
김성재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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