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실리콘밸리은행(SVB)을 기점으로 국제 은행 파산 사태가 번져 업황 부진, 수출 채산성 악화를 겪는 국내 산업계에 위험을 가중시킬 우려가 번지고 있습니다. 금융 불안이 퍼져 회사채 경색 등 기업의 유동성 악화가 심화될 것이란 걱정입니다. 금융불안에도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하는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금융상품 위험자산을 확대해온 금융권 및 기업들의 투자손실이 커질 것에 대비해 유동성 대책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합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파산 위험을 막기 위한 금융당국의 규제와 금융사의 자본충실을 위한 대출 상환 요구가 커지면 실적이 부진한 한계기업 등 신용도가 떨어지는 회사들부터 운영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내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사 신용도가 떨어져 자금 조달이 막히면 그룹 계열사로 위험이 순식간에 번진다”라며 “계열사 신용등급이 줄줄이 떨어져 구조조정에 이른 사태가 과거에 경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또다른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운영자금의 차입비중이 높은 만큼 벌어들이는 돈이 많은 대기업에 비해 금융시장 경색 신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습니다.
금산결합집단 위험전이 경고등
국내 삼성전자의 경우 연초 채권 등 위험자산을 크게 줄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현금성자산이 49조원대로 작년초 39조보다 늘어나 있고 채권 위주인 상각후원가측정 금융자산이 3조3690억원에서 4146억원까지 줄었습니다. 현대차는 지난해 사상최대 실적을 내 당분간 유동성 위험에 빠질 걱정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들 삼성, 현대차는 금융 계열사와 연결된 금산결합집단으로 금융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금융당국의 제재가 강화될 전망입니다.
연초 신종자본증권 문제로 흥국생명의 모회사인 태광그룹이 긴급 수혈한 사태도 있었습니다. 금산결합집단인 한화도 한화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만기일이 내달 다가옵니다. 한화생명은 앞서 흥국생명 사태가 번지자 콜옵션 행사를 공개적으로 약속한 바 있습니다.
SVB 파산 등이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리먼브라더스 파산처럼 번질 것이란 우려는 약합니다. 미국 정부와 연준이 파산을 막지는 못했지만 억제 조치를 적절히 실행하고 있다는 평가가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금융시장 전망이 어두운 것도 사실입니다.
SVB의 파산 배경은 미국의 고강도 통화긴축에 따른 금리상승으로 채권 등 자산평가손실을 유발한 이유가 큽니다. 코로나19 이후 국내 금융권과 기업도 주식과 채권 등 금융상품 투자를 확대하고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인수합병(M&A)을 활발히 수행했던 만큼 위험자산이 커졌습니다.
수출 채산성 악화 와중에 금융불안
삼성은 반도체 업황 부진을 겪고 있고 실적이 좋은 현대차도 미국의 IRA 대응 및 현지 공장 신축 투자 등으로 비용부담이 커질 전망이라 안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실적이 나빠진 수출기업들의 경영난이 예상됩니다.
매출이익이 줄어든 기업들이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차입금을 늘리는 가운데 금리 인상은 자금조달비용 부담으로 연결됩니다. 미국은 이날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에서 금리를 소폭 높였습니다. 잇따른 은행 파산 결과로 금리 인상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시장 예측이 있었지만 파월 의장은 올해 안에 금리인하할 가능성은 없다며 강수를 뒀습니다.
각종 경제지표도 기업에 역방향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월 국내 유동성은 광의통화, 평잔 기준으로 기업 부문이 전년동월대비 4조6000억원 감소했습니다. 2월 수입물가는 원화기준으로 전월대비 2.1% 상승해 0.7% 오른 수출물가를 더욱 압박했습니다.
회사채 시장도 냉각기류입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말 부실채권은 10조1000억원으로 전분기 말보다 4000억원 증가했습니다. 전체 부실채권 중 기업여신이 8조3000억원으로 82.3%나 됩니다. 금융투자협회는 이달들어 20일까지 국채, 지방채, 회사채 등 전체 채권 회전율이 9.87%를 기록해 역대 최저치를 보였다고 전했습니다.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채권시장이 얼어붙었던 때보다 SVB 사태 파장이 시장을 더욱 위축시킨 모습입니다.
정화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기업의 자금조달 수요가 확대됐음을 고려할 때 금융시장 변동성의 급격한 확대는 금융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책당국과 한국은행은 시장 변동성이 높아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한편 기업도 유동성 위험을 중심으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