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준익 기자] '내연기관의 자존심' 슈퍼카 업체들이 서서히 엔진 굉음을 포기하고 전기차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전동화 전환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높아지는 환경규제와 완성차 업체들의 고성능 전기차가 속속 등장하면서 미래 생존력을 위해 전기차를 택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페라리는 2025년 자사 최초의 순수 전기차를 출시하고 2026년까지 전체 생산 대수 대비 하이브리드·전기차 비중을 60%까지 끌어올릴 계획입니다. 2030년까지 그 비중을 80%까지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PHEV 시스템을 적용한 브랜드 최초의 스파이더 V6 모델 '296 GTS'.(사진=페라리)
페라리는 이를 위해 이태리 마라넬로 생산공장을 확장해 하이브리드·전기차 생산 전용 라인을 만들 계획인데요. 내년 완공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페라리는 2019년부터 라인업에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모델을 운영 중입니다.
람보르기니는 지난달 브랜드 최초의 PHEV 슈퍼 스포츠카 '레부엘토' 국내에 공개했는데요. 람보르기는 레부엘토를 시작으로 내년까지 모든 라인업의 전동화 로드맵을 추진할 방침입니다. 2028년까지 총 25억유로를 투자하는 이 전동화 계획은 람보르기니 역대 최대 프로젝트입니다.
애스턴마틴은 미국의 전기차 스타트업인 루시드와 손잡았습니다. 루시드 전기 구동계 및 배터리 관련 기술 등을 사용해 전기차를 개발할 방침인데요. 2025년 첫 전기차를 공개하고 2026년까지 애스턴마틴의 모든 차량에서 전동화 파워트레인 선택지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롤스로이스도 2030년부터는 전기차만 만듭니다. 지난해 공개한 첫 순수 전기차 '스펙터'가 그 시작입니다. 벤틀리도 2025년부터 2030년까지 매해 새 전기차 모델을 선보일 방침입니다.
그동안 슈퍼카 업체들은 브랜드 정체성 때문에 전동화를 꺼려왔습니다. 또 배터리 기술이 아직 슈퍼카의 요구를 만족시킬 정도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잇달아 내연기관 생산 중단을 선언하고 전기차를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수익성 악화에 시달렸던 포르쉐가 '타이칸' 출시로 재기에 성공한 것도 전동화를 부추겼죠.
슈퍼카는 환경기준이 높은 유럽이 주요 시장인 만큼 내연기관 엔진만 고집하면 판매 자체가 불가능진다는 위기의식도 전동화 전환 요인으로 분석됩니다.
브랜드 최초의 PHEV 슈퍼 스포츠카 '레부엘토'.(사진=람보르기니)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엔진 특성을 가지고 브랜드 이미지가 극대화된 슈퍼카 업체들이 이제는 친환경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판매 자체가 심각할 정도로 환경 규제가 강화됐다"며 "전기차까지는 아니어도 하이브리드차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만큼 고급 프리미엄 브랜드 위치도 이제는 바뀌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슈퍼카 업체들의 전동화 전략에 따라 이제는 100년 넘게 내연기관에서 쌓은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전기차에서도 이어 갈 수 있을 지가 관건입니다.
업계에서는 하이브리드차는 엔진이 적용되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지만 전기차의 경우 엔진, 변속기가 아닌 배터리, 모터 기술력이 중요해 슈퍼카 브랜드 명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오히려 전기차는 테슬라처럼 새로운 브랜드가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실제 크로아티아의 고성능 전기차업체 리막은 지난해 최고 시속 412km에 달하는 '네베라'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리막은 크로아티아 발명가 마테 리막이 2009년에 설립한 신생 전기차 업체로 포르쉐, 현대차그룹이 투자했습니다. 리막과 손잡은 부가티 역시 페라리, 람보르기니가 순수 내연기관을 포기하고 PHEV로 개발 방향을 튼 것처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김 교수는 "현재 메르세데스-벤츠나 BMW도 전동화 과정에서 브랜드 이미지 유지에 고민이 많은데 슈퍼카 브랜드는 더 어렵다"며 "도리어 새로운 브랜드에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황준익 기자 plusik@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