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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명복을 빌 염치가 없다
입력 : 2023-07-26 오전 6:00:00
‘금쪽이’라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처음엔 ‘금쪽같은 내 자식’, ‘금지옥엽’같은 게 연상됐다. 그런데 일선 학교에서는 의미가 좀 달랐다. 학부모의 관심 표현이 유별나거나, 자기밖에 몰라서 급우관계나 학교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큰 학생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반이 엉망이다. 교사 자격이 없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 모 초교 교사에게 학부모가 했다는 말이다. 그 반에서 학생간에 다투다 연필로 이마를 긋는 일이 발생했고 교장 주관하에 학생들 화해로 마무리됐는데, ‘연필긋기’를 당한 학부모의 말로 짐작된다. 그 부모 심정, 이해못할 바 아니다. 또, 담임교사가 임용 16개월밖에 안됐으니 경륜이 부족할 수 있다. 백보 양보해서, ‘초보 교사라 사고를 막지 못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교사 자격 운운 하는 건 모욕이다. 장기간의 집단적 왕따같은 거 말고, 우발적 다툼까지 교사가 다 막을 수 있을까. 부모도 집에서 자녀들 간 다툼을 늘 막지는 못한다. 
 
그 학부모 항의가 교사 자살의 직접 원인인지 명확히 밝히기는 힘들겠지만, 자괴감이나 모욕감을 줬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교사의 권위-권리 추락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왜 우리 사회는 항상 누군가 죽고나서야 개선책을 찾을까. 누군가가 죽기 전에는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고치지 못할까. 노동현장이 그렇고 각종 참사나 재해도 그렇다. 
 
영어 속담 중 “학예회에 간 부모”라는 게 있다. 무대에 학생이 수십 명이지만 부모에게는 자기 자식만 보이는 걸 비유한 말이다. 부모자식 간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 천륜이다. 그러나 학교는 다르다. 학교의 존재 이유는 사회화다. 사회화는 아동이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모든 아이는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그 잘잘못을 통해 공동체 규범과, 더불어 살아가는 교양을 체득하는 게 교육이다. 
 
교사노조에 따르면, 교육청 등에 제기되는 학부모 민원의 약 35%는 이른바 ‘내 아이 기분 상해죄’라고 한다. 아이의 투덜거림이 곧 민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수업도 생활지도도 불가능하다. ‘내 세금으로 교사 월급주니 이 정도는 권리’라 여기고 불쑥불쑥 행동한다면 횡포다. 교사 자격을 묻고 따지려면 학부모의 자격도 성찰하는 게 경우에 맞다. 교육부가 작년 12월 발표한 ‘교육활동 침해현황’에 따르면, ‘19년~’22년 전국 초교에서 접수된 교육활동침해 749건 중 262건이 학부모의 침해행위로 최다였다. 유·초·중·고를 통틀어 접수된 학부모 침해행위 유형은 모욕및명예훼손이 전체 635건 중 268건으로 1위, 정당한 교육활동을 반복적으로 부당하게 간섭한 경우가 132건으로 그 다음이었다.
 
‘군사부일체’나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을 확실히 지키자는 것이다. 그게 공평이고 공정이다. 교사에게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현 상황에서는 페스탈로치가 와도 제대로 된 교사 역할을 할 수 없다. 학생이 욕하거나 발길질해도 당해야 하고, ‘힘 센’ 학부모도 신경써야 하는 교사. 꾸지람하려면 아동학대 피소를 각오해야하는 교실. 일부 학부모의 횡포를 규율하지 못하면 교육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 붕괴는 이미 시작됐다. 교육의 붕괴는 미래의 붕괴다. 
 
참담함과 막막함에 시달리다 자진했을 그 선생님. 차마 명복을 빌 염치가 없다.
 
이강윤 정치평론가·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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