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엔씨소프트(036570)가
웹젠(069080)을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중지 등 청구 소송은 '리니지라이크' 쏠림 현상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리니지 아류작이 쏟아지며 엔씨와 타사가 나눌 이익이 갈수록 줄어드는 이 때, 새 장르 개척이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른바 한국형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MMORPG)이 수명을 다한 것 아니냐는 업계 내 우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가운데, 법원이 엔씨 '리니지M'의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와 웹젠 'R2M'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아울러 이제는 좁은 시장이 된 MMORPG를 둘러싼 업계의 실제 고민도 들어봤습니다.
서울법원종합청사. (사진=이범종 기자)
법원 "리니지M 구성 요소, 저작권 보호 대상은 아냐"
지난 18일은 엔씨가 웹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긴 날이지만, 시원하게 웃을 수만은 없는 날이었습니다. 엔씨가 낸 '표절'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판결문의 주요 내용을 복기해볼까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1부(김세용 부장판사)는 "피고(웹젠)는 R2M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게임을 일반 사용자들에게 사용하게 하거나 이를 선전·광고·복제·배포·전송·번안해서는 안 된다"며 엔씨에 10억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습니다.
법원 판단을 요약하면, 리니지M 내 각 요소는 기존 게임의 변형·차용이라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지만, 이들 요소를 작품에 선택·배열·조합한 노력으로 얻은 성과는 보호해야 한다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비빔밥 개별 재료는 저작권으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쓱쓱 버무린 비빔밥의 맛과 모양을 똑같이 따라하면 부정경쟁이라는 뜻이죠.
앞서 엔씨는 웹젠이 2020년 8월 출시한 R2M이 자사가 2017년 6월 내놓은 리니지M을 베꼈다며 저작권 침해와 부정경쟁행위를 주장했습니다. 재판부는 저작권 침해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웹젠의 행위가 부정경쟁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리니지M의 '아인하사드 시스템'과 무게 시스템, 기타 화면 구성 등을 검토했는데, 이들 요소가 리니지M만의 독창적인 체계라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아인하사드 시스템은 게이머가 얻는 경험치와 재화 획득량, 장비 아이템 획득 가능성을 3단계로 나누는 체계입니다. 각 단계를 보여주는 아이콘은 두 개의 나뭇잎이 겹친 모양으로 표현됩니다. 색깔은 회색, 초록색, 금색 순입니다. R2M '유피테르의 계약'도 유사한 표현을 썼습니다.
가방에 일정 무게가 쌓이면 2단계에서 회복 기능이 제한되고 3단계에서 공격을 못하게 되는 무게 시스템도 들여다 봤습니다. 3단계 무게에서 공격을 시도할 때는 소지품 정리 안내문이 뜹니다.
이 밖에 특정 단계부터 강화 실패시 무기가 파괴되는 설정, 뽑기 아이템으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방법도 살폈습니다.
재판부는 각 부분에 대해 "게임 규칙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로서 설령 여기에 독창성·신규성이 있다 하더라도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인하사드 수치별로 3단계를 구분하는 방식은 게이머의 흥미와 몰입도를 높일 수 있어 창작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이와 관련한 출석 체크 시스템은 이 기능을 게임화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거나 공통적 또는 전형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무게와 장비강화, 변신 시스템도 1987년에 나온 RPG '넷핵(Nethack)' 등 기존에 이미 있는 게임 규칙을 변형하거나 차용한 점 등을 들어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들 각 구성 요소의 선택과 배열, 조합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창작적 개성을 가진다는 엔씨 측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원고 게임의 창작성 있는 표현 부분은, 아인하사드 수치별로 구분한 3단계를 1단계 회색, 2단계 초록색, 3단계 금색으로 해 각 두 장의 나뭇잎이 겹쳐진 모양으로 나타낸 부분일 뿐"이라며 "나머지 각 구성요소의 선택·배열 및 조합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 형식은 아이디어를 게임화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하거나 공통적 또는 전형적으로 수반되는 표현 등에 불과해 다른 게임과 구별되는 창작적 개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언급했습니다.
아인하사드 시스템이 게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양적·질적 비중을 볼 때, 웹젠 게임이 그와 유사한 표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리니지M 전체에 대한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입니다.
엔씨소프트 사옥. (사진=엔씨소프트)
선택·배열·조합 성과는 보호 대상
다만 재판부는 엔씨가 리니지M의 구성 요소를 구현하는 데 쏟은 노력과 게임 구성 요소의 조합, 이를 통한 명성과 경제적 가치, 고객 흡인력과 업계 내 비중, 경쟁력 등을 볼 때 이 게임 시스템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이라며 웹젠의 부정경쟁행위를 인정했습니다.
우선 엔씨는 1998년 9월3일 출시한 PC판 리니지의 모바일판인 리니지M을 만들기 위해 2015년경부터 2022년 8월까지 약 1000억원 넘는 개발비를 투자했습니다.
이후 리니지M은 '리니지라이크'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리니지의 명성과 고객 흡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재판부는 리니지M의 장비 강화 시스템 같은 요소들은 기존 게임 규칙의 차용·변형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 출시 전까지 기존 작품에서 리니지M 내 구성요소의 선택·배열·조합을 비슷하게 구현한 게임이 없었던 점을 볼 때, 엔씨가 이 같은 조합을 구현하는 데 많은 비용과 노력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반면 MMORPG에는 세계관, 월드, 캐릭터 등 다양한 구성요소가 있고, 해당 시스템들 비중은 극히 일부라는 웹젠 측 주장은 근거 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웹젠)는 원고 게임의 명성과 고객 흡인력에 무단으로 편승하기 위해 피고 게임에 이 사건 각 구성요소의 선택·배열·조합을 거의 그대로 차용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그 근거로 △웹젠 R2M의 유피테르 시스템이 엔씨 리니지M 아인하사드 3단계 시스템과 흡사한 점 △가방 아이콘과 무게 비율 표시도 비슷한 점 △3단계 무게 때 공격하려 들면 소지품 정리 안내가 비슷하게 뜨는 점 △아이템 강화 도중 파괴되는 과정과 화면 표시가 유사한 점 △주요 UI가 빼닮은 점 △직장 인증이 필요한 '블라인드' 앱에서 이 사건 관련 댓글 중 "그냥 아예 카피해라가 지시였던 게임"이라는 내용이 확인된 점 △웹젠 직원이 수사 기관 조사 때 리니지M 카드 뽑기 아이템으로 얻을 수 있는 카드 등급별 획득률을 참고했다고 진술한 점 등을 들었습니다.
일부 R2M 게이머가 이 게임 유피테르를 '아인(아인하사드)'으로 칭하고, 게임 내 재화인 골드를 '아덴(리니지M의 재화 아데나)'이라 부르고, R2M을 '신섭(리니지M의 새 서버)'이라거나 UI 유사성을 지적하는 반응을 보인 점도 판단 근거였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웹젠) 게임은 원고 게임만의 특징적 요소들과 아인하사드 및 무게 아이콘 등과 같은 구현 방식까지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등 원고 시스템에 대한 모방의 정도는 강하다"며 "이런 피고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게임 업계의 관행에 비추어 부당하다고 볼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오히려 피고의 행위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게임 업계에서 굳이 힘들여 새로운 게임 규칙의 조합 등을 고안할 이유가 없어지게 될 우려가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양사는 항소할 뜻을 밝혔습니다. 웹젠은 선고 당일 부정경쟁 판단의 부당함을 다투겠다며 즉시 법원에 항소장을 냈습니다. 엔씨는 2심에서 청구액을 늘리겠다는 입장입니다. 엔씨가 4월 카카오게임즈와 엑스엘게임즈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중지 등 청구 소송의 향방도 관심을 모읍니다.
항소심도 원심과 같은 판단을 내릴지는 알 수 없습니다. 1심 재판부가 들여다 본 게임 내 개별 요소의 특징과 그 조합의 경제적 가치가, 웹젠 주장대로 세계관, 월드, 캐릭터 등 다양한 구성요소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판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MMORPG 포화에 "장르 다변화 필요"
게임 업계는 각 요소의 변형과 차용이 저작권 보호 대상은 아니라는 재판부 판단과 함께, '새로운 게임 규칙의 조합'에 대한 지적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리니지라이크로 점차 좁아진 MMORPG 시장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에 힘 쏟을 때가 됐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게임 업계 관계자는 "일부 게임사가 안전한 길을 찾다가 벌어진 일로 보인다"며 "업계 안에서 장르 다변화를 시도하거나 같은 장르라도 차별화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장르 다변화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회사들이 준비하는 패키지 게임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며 "이 게임들이 성공을 거둘 경우 다른 회사들도 이야기 중심으로 작품성 있는 패키지 게임 개발에 뛰어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