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가 교내 종합강의동인 충무관에 있던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충무관 앞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은 학교 밖으로, 지청천 이범석 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 흉상은 학교 안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충무관 안에 있는 대한제국 박승환 참령 흉상도 교내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홍 장군은 독립기념관 수장고로, 다른 다섯 분은 육사 교내 육군박물관으로 보내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여섯 분 흉상은 2018년 육사가 학교 기원과 관련해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세웠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에 문을 열고 1920년까지 2000여명의 독립투사를 양성했죠. 이회영 선생이 만들었고,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은 교관으로 활동하거나 학교 출신자를 모아 일본군을 무찔렀습니다.
박승환 참령은 일제가 1907년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할 때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입니다. 그는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대원들한테 무기 반납을 지시한 뒤 자결합니다. 그는 유서에 “나라에 군병이 있는 이유는 나라를 지키는 데 있는데 지금 외적이 온 강토에 가득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것은 황제의 뜻이 아닌 적신이 황명을 위조한 것이므로 나는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며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대대장의 죽음을 접한 장병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와 탄약을 되찾아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장병들은 서울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를 유럽 주요 언론이 ‘남대문 전투’라고 보도했습니다. 화력과 병력에서 밀린 대한제국 장병들은 흩어져 의병으로 전환합니다.
8월31일치 육사 보도자료를 보면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의 정체성과 독립투사로서의 예우를 동시에 고려해 육사 외 독립운동 업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이전한다”고 적었습니다. ‘육사의 정체성’을 사유로 들었습니다. 8월29일 육사총동창회가 성명을 냈습니다. 여기에서 육사가 “1946년 국방(조선)경비대로 개교한 이래…”라며 미 군정 시기로 육사 기원을 규정하고, 홍 장군 흉상 이전을 요구합니다.
이런 움직임을 보면 현재 육사와 육사총동창회를 이끄는 인사들은 독립전쟁 역사보다는, 1946년 미 군정이 만든 조선경비대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육사의 뿌리로 기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논쟁 초기에는 홍범도 장군한테 흠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결말을 보니 홍 장군뿐만 아니라 독립전쟁 영웅 모두를 밀어내고 있죠.
이런 생각이 타당할까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요?
1945~1948년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과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 등 다양한 사람이 국군 창설에 참여합니다. 누가 구심점 노릇을 해야 할까요.
미 군정은 국방부와 국군 전신으로 통위부와 조선경비대를 만듭니다. 그때 일본 육사 26기 출신으로 대좌(대령)를 달았던 이응준과 만주군 군의관 출신인 원용덕이 “광복군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의 대의를 살리기 위하여 통위부장이나 경비대 총사령관은 임정계 인사 가운데 중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본인들은 자숙하죠. 미 군정은 중국에 머물던 이범석(1900~1972.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지냄)한테 사람을 보내 통위부장을 맡아달라고 제안합니다. 이범석은 국권 회복이 먼저라며 거절했죠. 광복군은 외국에 발이 묶인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로 경비대를 조직하면 독립 대의에 어긋난다고 본 거죠.
미 군정은 이응준과 다시 의논했고 이응준은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1879~1950)을 추천합니다. 이응준은 “임시정부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가 계승할 수 있도록” 하자고 유동열을 설득합니다. 유동열은 고민 끝에 “이 길이 광복군을 위해 통로를 개척하는 기회”라며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김구도 “많은 광복군 장병을 심어두는 게 현명하다”며 선택을 지지합니다. 미 군정은 조선경비대 총사령관도 광복군 편련처장을 지낸 송호성으로 바꿔 임명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이범석을, 첫 국방부 차관에 광복군 출신인 최용덕을 임명합니다. 1947~1949년 조선경비대를 모두 6개 여단으로 증편할 때 4개 여단장을 광복군 출신이 맡았습니다. 육사에는 6대 최덕신, 7대 김홍일, 8대 이준식, 9대 안춘생 등 광복군 출신을 교장으로 앉혔습니다.
일각에서는 미 군정 시기 조선경비대와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국군과 육사가 시작된 역사를, 문재인 정부가 독립전쟁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아요. 신생 국군이 어떻게든 독립군과 광복군 전통을 이어받도록 이승만 정부는 물론이고 미 군정조차 노력했습니다.
독립전쟁 정통성이 흔들린 사연은 있죠.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얼마 못 가서 군 주요 보직에서 밀려나고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숫자가 워낙 많았죠. 한국전쟁 때 광복군 출신 장군이 명성이 높아지자 이승만 정부가 뒤로 밀어낸 영향도 컸습니다.
대표적으로 김홍일(1898~1980)은 장졔스의 중국군 사단장과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습니다. 실전 지휘 경험을 갖춘 드문 인물로 한국전쟁 초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북한군 진격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모략을 받고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예편당합니다.
육군에서는 초대부터 1975년 21대까지 참모총장 직책을 일본군 또는 만주군 경력자가 맡았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에 독립전쟁 전통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이런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육사와 육사총동창회 인사들은 독립전쟁보다는, 국방경비대 역사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육사 생도 때 이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일까요? 육군 요직을 차지한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교육 방향을 잡았던 걸까요.
미군은 1776년 독립전쟁 역사를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민병대를 조직해 영국 왕실 군대와 싸운 시민혁명 전통을 중시합니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렸습니다. 왕정 시절의 용병과 달리, 공화정을 지키려고 국민이 참여해 ‘국민의 군대’를 만듭니다. 프랑스군은 시민혁명 이후를 뿌리로 기립니다.
대한제국 의병 봉기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독립전쟁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식민지 노릇을 몇백년하고 변변한 독립투쟁 이력도 없는 미개 국가와 한국은 다릅니다. 우리 군대가 독립전쟁 역사를 계승하지 않고 홀대할 이유가 없죠.
문재인 정부 들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2017) <근현대 한국군의 역사>(2019) <국방 100년의 역사>(2020)와 같은 책을 잇달아 펴냅니다. 역사적 사실에 터를 잡아 국군 정통성을 강화하는 작업이었죠. 육사도 같은 취지에서 2018년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세웠는데 요즘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