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뉴스북은 네오위즈 액션 RPG 'P의 거짓' 결말을 다룹니다. 직접 결말을 알아내고 싶으신 분께는 읽기를 권하지 않습니다.
올 가을은 '소울의 계절'입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검을 든 피노키오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기 때문이죠. 돌풍의 주인공은 네오위즈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가 만든 액션 RPG 'P의 거짓'입니다.
이 게임 장르가 그 어렵다는 소울라이크(소울류)인데도 회자되는 이유는 단연 비극과 감동을 한데 엮은 서사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게임은 상호 작용 매체라는 점에서 감상 시간의 격차가 큽니다. 소울류 잘 하는 사람은 30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저는 최근 127시간만에 1회차 결말을 보았습니다. 물론 고생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 게임은 자식 잃은 아버지의 뒤틀린 부성애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거듭난 꼭두각시의 슬픈 관계를 다룹니다. 그래서 저는 게임을 하는 내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A.I.'가 떠올랐습니다. 이들 작품이 상실의 아픔을 달래려는 부모와 그 자식의 재현물(꼭두각시 혹은 로봇) 간 관계를 다뤘고, 재현물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또 다른 인간으로 거듭났기 때문이죠.
만국박람회장 안에 있는 ‘연민의 성녀상’. 이 성녀상을 이용해 각종 기능을 초기화할 수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에르고 활동으로 '코기토' 된 P
우선 P의 거짓 이야기를 정리해 봅시다. 첨단 기술, 특히 자동인형(AI 로봇)으로 부흥한 도시 크라트에서 사람을 굳게 하는 화석병 확산과 인형의 폭주 살인이 일어납니다. 인형들은 '위대한 약속'으로 불리는 4개 조항에 묶여 사람을 죽일 수 없는데도 말이죠.
피노키오(P)는 자신을 포함한 자동인형의 동력원이자 화폐로도 쓰이는 '에르고(Ergo)'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에르고는 화석병에 걸린 인간의 기억과 시간이 담긴, 인간의 정수였습니다. 이 때문에 위대한 약속에 묶여 생산된 인형들 사이에서 자아를 각성한 인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공방연합의 수장으로 자동인형을 제작한 제페토는, 과거 자신이 일에 몰두하느라 보육원에 맡긴 아들 '카를로'가 화석병으로 숨지자 후회에 휩싸입니다. 그는 아들의 에르고를 'P 기관'이라는 심장에 넣어 피노키오를 만들었습니다. 아들 이름 카를로는 원작 동화 작가인 카를로 콜로디와 같습니다. P가 다른 인형과 달리 인간처럼 거짓말 할 수 있던 이유는, 제페토가 아들 카를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자유 의지를 줬기 때문이지요.
처음엔 인형 폭주의 원인인 줄 알고 쓰러뜨렸던 '인형의 왕 로미오'는 카를로의 생전 보육원 단짝이었는데요. 그가 P를 만나 싸우기 전 P에게 보낸 에르고 파장 메시지에서 '위대한 약속 0항'을 알려줍니다. "1항. 모든 인형은 창조주의 명령에 복종한다. 0항. 창조주는 제페토. 주세페 제페토."
게임 1회차에선 인형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장치가 없어서 각 장 인형 보스 대사의 자막이 뭉개져 있지요. 1회차 후반에 얻은 장치 덕에 2회차부터 모든 대사가 보이는데요. 사실 인형의 왕과 다른 인형들은 제페토가 일으킨 인형 폭주와 화석병 확산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쓰러뜨리러 온 P에게 오해를 풀고 함께 사태를 해결하자며 인형의 언어로 이야기 하지만, P는 이걸 못 알아듣고 제페토가 시키는 대로 인형들을 부순 것이었습니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아들 카를로를 인간으로 되살리기 위해 막대한 양의 에르고와 '신의 팔'이라는 재료가 필요해 제페토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걸 알게 됩니다. P는 제페토의 의도를 확실히 알기 전에 '신의 팔'을 가진 연금술사 시몬 마누스를 쓰러뜨립니다. 시몬은 P가 죽을 때마다 그의 시간을 되돌려 살려낸 파란 요정 소피아를 자신의 성에 박제한 인물입니다. P가 죽을 때마다 화면에 'Lie or Die' 문구가 뜨며 깨진 시곗바늘이 되돌아가는 연출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 때문에 영혼이 상처입은 시몬은 투명한 심성을 지닌 소피아를 갖고 싶었습니다. P는 그동안 성에 갇힌 소피아의 영혼을 만난 거였죠.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안식을 주면, 소피아의 에르고가 P에게 스며들어 부활을 계속 돕습니다.
그리고 제페토에게 필요한 마지막 재료는 카를로의 기억이 담긴 P의 심장이었습니다. 막대한 에르고를 모아 신이 되려던 시몬을 쓰러뜨리고 제페토에게 가면, 제페토는 P를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줄테니 심장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를 거절하면 제페토가 가방에서 P보다 먼저 만든 인형을 꺼내 공격합니다.
P가 힘겹게 '이름 없는 인형'을 물리치면, 상대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공중에서 날아와 검을 꽂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페토가 P 대신 가슴에 검을 맞고 "카를로의 심장을... 망가뜨릴 셈이냐?"고 일갈합니다. 그 사이 P의 가슴에선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소리가 들리죠. P는 곧 이름 없는 인형의 심장을 꺼내 터뜨리고 쓰러진 제페토를 안습니다.
P는 자신을 아들 카를로의 부활을 위한 도구로만 여긴 제페토와, 그런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한 자신의 연민이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인간 소년(코기토)가 된다. P의 눈물을 보고 놀란 제페토는 후회 속에 사과하며 숨을 거둔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사랑받지 못한 '아들' P의 눈물
제페토는 P의 옷깃을 부여잡고 원망하려 했지만, 이윽고 놀람과 후회 속에 죽음을 맞습니다. 단지 아들의 환생 수단으로만 여겼던 꼭두각시의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던 겁니다.
제페토는 P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놀라며 "정말 미안하구나, 아들아" 라는 말을 남긴 채 눈 감습니다. P는 그런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영화 'A.I.'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주인공인 소년 로봇 데이빗이 극 중 마지막으로 만난 하루살이 어머니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눈물 흘리며 인간 소년이 됐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버지 제페토가 P를 꼭두각시로만 보고 그 심장 안에 있는 카를로만 아들이라 여긴 점에서 기예르모의 '피노키오'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 속 제페토도 인간 아들 '카를로'가 있었지만 숨졌다는 점이 똑같은데요.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선 카를로가 2차 대전의 참화에 희생됐습니다.
나중에 영화에서 제페토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피노키오를 '아들의 재현물이 아닌 피노키오 그 자체'로 사랑하게 됩니다. 피노키오를 끌어안은 제페토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 (눈물 흘리며) 난... 난 널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그때 파란 요정의 힘으로 되살아난 피노키오가 아버지의 뺨에 손 대고 말합니다. "그럼 전 피노키오로 살래요. 제 아빠로 살아주세요."
영화와 게임 속 제페토 모두 친아들 카를로의 재현을 바랐습니다. 다만 한 명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난 피노키오를 받아들였고, 다른 이는 죽기 직전 P의 눈물을 보고서야 인간으로 거듭난 P만의 정체성을 깨달았단 점이 대비됩니다.
P는 단순히 카를로의 재현이 아닙니다. 카를로의 에르고를 통해 P가 작동한 건 사실입니다. P는 그 바탕에서 제페토를 아버지로 여기며 주체적인 추론 활동을 했지요. 하지만 거짓말과 음악 감상과 피아노 연주, 눈물과 희생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왔습니다. P가 인간성을 얻는 주요 순간에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소피아에게 안식을 주었을 땐 머리칼이 회색으로 변하는 점도 눈여겨 볼 점입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P가 카를로를 그리워한 아버지 제페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아들 재현 도구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이쯤에서 제가 지난달 14일에 보도한 ''코기토' 향한 P의 여정, 에르고 품고 달린다'를 통해 P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철학에서 에르고는 이성 활동, 추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에르고가 인간의 기억과 시간을 담은 정수라는 설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베니니 공장에서 주워 읽은 '데카르트의 수기'에도 P가 이성 활동을 통해 인간으로 거듭나는 구조에 대한 실마리가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라는 글을 남겼죠. 이는 사유의 주체를 신에서 인간으로 정립한 근대 정신의 명제입니다.
접속사로서의 에르고와 이성 활동으로서의 에르고를 종합해 보면 P의 거짓 속 에르고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P가 인간의 이성 활동인 거짓말로 이야기를 이어가, 결국엔 사유의 주체인 코기토(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물론 데카르트는 '존재'의 조건으로 '사유하는 나'를 전제했지만, P의 이성 활동을 완성시키는 건 코기토인 우리, 게이머입니다. 게임이 상호작용 매체인 덕분에 가능한 설정과 해석이지요.
결국 P의 토대가 된 에르고는 본래는 카를로의 것이었지만, P는 크라트 호텔 주인 안토니아의 말처럼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쌓으면서 한 명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겁니다.
이는 P가 이름없는 인형과 싸우는 동안, P의 태엽을 움직여 에르고가 속삭이게 하고, 온기를 느끼게 하고, 나중엔 심장이 고동치게 한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는 연출로도 알 수 있지요.
P가 흘린 눈물도 제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저는 P의 눈물에서 자신을 카를로의 재현 도구로만 봐 온 아버지와, 사랑 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보았습니다. 이는 영화 A.I.에서 데이빗이 흘린 기쁨의 눈물과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본래 인간으로 태어난 카를로는 일 중독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화석병으로 불행한 삶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의 에르고가 P의 동력원이자 '위대한 약속' 없이도 아버지를 따르는 조건이 되었지만, P는 자신만의 사유 활동을 통해 한 명의 주체적인 인간(코기토)으로 거듭났습니다. 카를로가 태어난 인간이라면, P는 거듭난 인간인 셈이지요.
코기토가 된 P는 희생도 할 줄 압니다. 희생의 대상은 제작진이 파란 머리 요정을 재해석한 소피아입니다. P는 제페토가 숨을 거둔 뒤 소피아 모양으로 만들어진 인형에게 다가가 자신의 에르고를 넘기고 쓰러집니다. 이윽고 인형 몸에서 깨어난 소피아는 처음 크라트 호텔에서 P를 만났을 때와 같이 "이렇게 만나서 기뻐요"라고 인사하는데요. 이때 소피아 품에서 쓰러진 P와 그를 안은 소피아의 모습은 피에타상과 같습니다. 피에타상은 게임 중반부에 보게 되는 만국박람회장 속 연민의 성녀상에도 반영됐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P는 자신의 몸에 담긴 에르고를 소피아 인형에 넣고 쓰러진다. 소피아는 피에타상처럼 P를 안은 채, 크라트 호텔에서 건넨 첫 인사를 다시 건넨다. 2회차 실행을 하지 않고 호텔에 돌아가면, 소피아의 감사 편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소피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P를 되살렸음을 알 수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인형의 몸으로 영생을 얻은 소피아는 그동안 해왔듯이 P를 되살립니다. 결말 영상을 보고나면 게임이 끝나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2회차로 넘어가겠느냐고 묻는 창에서 반드시 취소를 눌러야 진짜 결말을 끝까지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라트호텔에 돌아간 P는 제페토의 책상에서 소피아가 남긴 감사 편지를 읽습니다. 금화열매를 아이템으로 바꿔주던 지안조가 자신의 본명으로 남긴 편지로도 인간으로 거듭난 P가 영생을 얻는 신인류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P는 자신의 희생으로 '함께 사는 인간'이 된 겁니다. 몸은 여전히 기계지만요.
반면 인간이 되길 포기한 피노키오는 울지 않습니다. P가 코기토 됨을 포기하고 제페토에게 심장을 주거나 소피아의 안식을 돕지 않은 선택을 했다면, 인간의 자아로 거듭나지 못한 채 '꼭두각시 피노키오'로 남은 결말을 보셨을 겁니다.
눈물을 닦은 P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운드8 스튜디오는 지금 P의 거짓 추가 이야기를 담은 DLC(내려받는 추가 콘텐츠) 개발에 한창입니다. 클로징 크레딧 이후 추가 영상에 후속작 주인공으로 나타난 '도로시'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도 P의 인생 2막을 기대하게 합니다.
네. '오즈의 마법사' 맞습니다. 네오위즈 잔혹동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클로징 크레딧과 추가 영상을 본 뒤 2회차로 넘어가지 않고 호텔에 가면, 인간이 된 피노키오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음정 곳곳에 회한과 추억이 묻어난 듯 구슬프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