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굉장히 많이 좋아졌어요.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나요? 혹시 뭔가 조치를 취하신 부분이 있을까요?”
얼마 전 첫째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학부모 정기 상담을 위해 방문했다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위와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피드백을 들을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저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죠.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로 말썽을 부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자잘하게 경고를 받았던 적이 많고, 올해 역시 학기 초부터 수업 태도나 돌발행동 등으로 몇 번 주의를 들었던 까닭입니다.
예상과 달리 학부모 상담을 비교적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안심을 한 것과 별개로 의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집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거든요. 엄마나 아빠가 이전과 다르게 행동한 것도 없고, 무언가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었는데, 타인의 눈에 유의미한 변화가 보일 정도로 아이가 달라졌다니, 무엇이 아이를 달라지게 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친구 한 명이 떠오르더군요. 몇 달 전 같은 반의 친구 한 명과 친해진 아이는 방학 동안 그 친구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습니다. 매일 놀이터에서 만나 함께 놀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도 하면서요. 이전에 비해 달라진 부분은 그 친구와 가까워진 것밖에 없는데, 어쩌면 그 부분이 관건이지 않았나 하는데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교우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고, 그 결과가 행동으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고요.
많은 이들이 문제 행동을 하는 어린이를 보면 그 가정에서 원인을 찾곤 합니다. 부모가 제대로 훈육을 하지 못했다거나, 분명 문제가 있는 가정일 거라고, 그래서 아이가 저런다고 말입니다. 과거의 저 역시 다르지 않았기에 충분히 이해할 법 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 저는 소란을 피우거나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면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부모가 대체 뭘 했길래 아이가 저러는가 생각하곤 했지요. 보호자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이들을 낳아 길러보니, 육아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욕구와 의사는 있되 아직 의무와 책임은 모르는 미성숙한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매순간 깨우쳤고, 아이에게 끼칠 수 있는 부모의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데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등 다른 가족 구성원, 학교, 학원, 선생님, 친구들, TV 프로그램, 이웃과 사회 등 아이를 둘러싼 환경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요. 그중에는 보호자인 제가 개입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으며, 때로는 아이의 고통과 슬픔을 알면서도 그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건 아이를 책임지는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부모에게는 아이의 양육자로서, 보호자로서, 아이를 올바르게 이끌고 제대로 훈육해야 할 마땅한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아이가 늘 부모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요. 앞서 말한 친구와 쌓아 나가는 우정처럼 부모가 섣부르게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육아의 힘든 점은 무수히 많지만 장점 중 하나는 이처럼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거기에 얼마나 많은 요소가 영향을 끼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른인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한승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