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총선이 5개월 정도 남은 요즘 주변으로부터 어떤 정치적 행보를 준비 중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질문에 선뜻 명쾌한 답을 못하고 우물거리게 된다. 현재 특정 정치 그룹에 속해 있지 않아 시스템이 굴러가는 대로 진행되는 명확성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년 총선이 어떤 방식의 선거제로 치러질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의 선거 전략을 세우기도 어려운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시민 참여 민주주의 결실을 보여 주었던 지난 2017년 촛불혁명 이후 처음 치른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과 진보 야당들 그리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각 시민단체들의 다양한 총의까지 모아 소선거구제 기반의 47석 준연동형비례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를 두고 정치 야합이라 주장하던 미래통합당이 강하게 반발하며, 듣보잡 비례위성 정당이라는 것을 출현시키며 새로운 정치 미래를 열고자하는 시대의 열망을 허무하게 무너트렸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아닌 다른 쪽이 더 많은 의석수를 가져가는 것은 악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라는 핑계로 더불어민주당도 과감하고 폭력적이게 비례위성정당을 만들기에 적극 동참했다. 결국 새로운 정치가 태동하고 다양한 정치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진입장벽 높이기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 구태만 남겼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이탄희 의원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병립형 비례 선거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강력한 반대의견을 들고 나서기도 했다.
병립형비례제로 회귀하자는 거대양당의 속셈에는 지역구 의석도 양당이 중심이 되어 서로 나누어서 가지고, 비례의석까지 서로 나눠먹자는 권력 독과점 차지하기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두 당이 대립을 하며 마치 정치적 지향을 위한 싸움을 치열하게 하는 듯 하다. 하지만 민생의 문제를 내실 있게 다루는 정책 등에 대한 대결보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해서 한쪽이 반사이익을 갖는 이권 싸움만 벌이고 있다. 이것이 작금의 정치를 진단하는 현명한 시민들의 눈이다.
정치 개혁의 핵심은 다양한 정치 그룹간의 정책 대결에 있다. 현재의 거대 양당의 독점 정치 구도 안에서는 싸움 잘하기 경쟁은 열심이지만 정작 정치 본연의 역할인 정책 잘하기 경쟁은 없다. 이 반사이익 구조는 혐오와 증오의 정치만 넘치게 되고, 우리 사회 각 층위에 다양한 갈등만 조장한다.
이렇게 정치 구조자체가 잘못되어있으니 태생적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이나 새로운 정치인이 등장하기가 어렵다. 매번 선거철마다 거대 양당 중심의 새로운 인물 투입 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 갈이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수의 새 인물을 투입해도 이미 잘못된 시스템 속에 섞인 인물 갈이의 결과는 구태의 반복일 뿐이다.
이런 정치 환경은 더 좋은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덜 싫은 쪽 선택하기를 국민들에게 강요한다.
국회 정치권력 안에 다양한 정치 그룹이 들어오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상대를 악마화해 내가 더 많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정치 구조의 개선이 시작될 수 있다. 또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나쁜 놈 규정하기 폭로형 정치도 줄어들 것이다. 협상이나 타협이 사라진 검찰 고소고발 사법정치도 줄어들 수 있다. 각 정당이 자연스럽게 경쟁하게 되고 한쪽의 힘만으로 밀어붙이는 정치가 불가능해질 것이고, 따라서 정치 그룹간의 연합도 자연스레 이루어 질 것이다. 현재의 암흑 시대를 마감하는 최소한의 시작은 현재의 준연동형 비례제라도 유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이 선언적으로 주장하던 선거제 개혁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촛불혁명 이전 2016년 선거제로 돌아가자는 국민의힘의 제안을 민주당이 받을 것인가 아닌가가 현재의 쟁점이다. 지난 2020년 총선에서 발생한 사표가 1200만 표였다. 시민의 다양한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고, 다양한 정치 세력이 받은 표만큼 의석을 가져가는 길은 민주당 지도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메마른 건기에 들어간 아프리카의 초원 세렝케티는 수많은 생명에게 고난의 시간을 준다. 긴 건기 끝에 우기가 시작하면 비로소 고난의 시기가 끝나고 풍요가 시작된다. 하지만 구석진 땅 끝까지 아직 물길이 닿지 않아 메마른 땅들이 여전히 있다. 이때 강물의 물기를 끝자락까지 닿을 수 있도록 갈래갈래 물길을 내는 존재가 있다. 바로 하마들이다.
민주당이 말라 타들어가는 새로운 정치의 골목골목마다 물길을 만들어주는 정치개혁의 하마가 되기를 감히 권고해 본다.
박창진 바른선거시민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