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마을 전경(사진=뉴스토마토)
충정로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빌딩 숲 사이 푹 꺼진 동네가 있습니다. 호박꽃이 아름답게 피어나서 ‘호박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입니다. 지금은 재개발이 시작돼 빈집뿐이지만 제가 봉사를 하던 5년 전만해도 수십 가구가 있던 동네입니다. 호박마을은 서울의 중심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재개발을 알리는 포클레인이 한두 대 모습을 드러내도 돈이 없어서, 거동이 불편해서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어르신이 전부였죠.
그곳에서 어르신께 말동무를 해드리고, 다른 동네로 이주 준비를 돕는 게 제 주된 업무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제가 댁에 들르는 걸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젊은 친구 보기 어렵다면서요. 슬슬 여름이 오는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선풍기 틀고 얼음물 마시며 저를 기다려주시곤 했습니다. 충정로역 바로 앞의 이씨 할아버지만 빼고요. 할아버지 댁은 항상 비어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반팔이 긴팔로 바뀔 때쯤 알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기대 없이 할아버지 댁을 두드렸는데 문이 열렸습니다. 밖은 서늘했지만 댁은 아직 8월의 후덥지근함이 남아있었습니다. 왜 오늘은 집에 계시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이제 가을이 와서”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동안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철에서 하루를 나신 겁니다. 2호선 내선순환 열차가 충정로를 떠나 다시 충정로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할아버지는 매일 더위가 사그라질 때까지 서울을 대여섯 바퀴 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지하철을 찾은 이유는 더위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활기. 등교를 서두르는 학생, 중요한 거래처 전화를 받는 직장인 등등 매일 집과 복지관만 오가던 할아버지에게 지하철은 무료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통계청이 지난달 26일 발표한 ‘2023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외롭다’,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고립감을 호소하는 60세 이상 고령층은 각각 24%와 14.5%로 집계됩니다. 전 연령층에서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같은 사회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인구는 944만 명으로 전체의 18.2%를 차지했습니다. 1990년 220만 명(5.1%)과 비교하면 30여 년 만에 4배나 늘어났습니다. 약 50년 뒤에는 노인인구가 전체의 50% 가까이 될 것이란 예측도 나옵니다. 우리나라엔 또 다른 호박마을과 이씨 할아버지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던가요. 적어도 그들이 외롭진 않은 세상이 되도록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해보입니다.
이효진 기자 dawnj789@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