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도착 신고 에피소드
기차역 한쪽에 자리한 경비경찰 파출소 안에서는 먼저 온 남녀 커플이 경찰의 질문에 대답하는 중이었다. 주로 여성이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소리를 들어 보니 러시아 원어민이다. 러시아인인데 와 있는 게 이상해서 그들이 떠난 후 내 차례가 됐을 때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터키와 러시아의 이중국적자라 했다. 옆에 있던 터키인 남편과 동행이어서 함께 조사 중이었었나 보다. 나 역시 방문 목적과 체류 일정 등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제한구역인 카노제로 암각화 방문을 위해 러시아측에 미리 보냈던 서류 인쇄본을 내밀었다. 만약을 위해 출력해 온 건데 그 덕분에 절차가 빨리 쉽게 끝났다. “떠날 때 다시 여기 들러서 기차표를 보여주고 가야 합니다.” 칸달락샤를 떠나는 기차표가 없었던 탓에 경찰이 다시 다짐을 둔다.
칸달락샤 기차역. 사진=박성현
칸달락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이 다가온 걸 보면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기보다는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승객 명단에서 외국인을 확인한 게 아닐까 싶었다. 반면 떠날 때는 그들이 알 것 같지 않았지만, 며칠 후 암각화 답사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약속대로 그들에게 구입한 기차표를 보여주고 떠난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참고로 말하자면, 원래 러시아에 입국한 외국인은 한곳에 7일 이상 머물 경우 체류 등록을 해야 하는데 숙박업소를 이용하면 체크인할 때 알아서 처리해 준다. 이는 구소련 시절의 유산으로 현재는 형식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칸달락샤가 자연보호구역이다 보니 단순한 체류등록 외에 다른 절차가 요구된 것이다. 귀국 후 검색해 보니 국경지대, 폐쇄군사지구, 환경재해지역 등 일부 경우에는 거주지에서의 외국인 등록 및 체류지에서의 등록이 허가 절차에 따라 수행된다고 쓰여 있었다.
‘백해의 진주’ 칸달락샤의 영광과 우울
카노제로 암각화로 가기 위해 거치게 된 백해의 도시 칸달락샤의 첫인상은 흐린 날씨처럼 우울했다. 도심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는 대낮에 술 취해 지나가는 중년 남성이나 내게 다가와 구걸을 하는 청년의 모습 때문이었을 수 있는데, 그동안 지나온 곳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들이었다. 문득 ‘실업률, 침체된 경제 상황…’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숙소 근처 세례요한탄생교회 앞에서 만난 할머니 신자가 이방인에게 보인 극도의 경계심도 부정적 인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가면서 겪은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리라. 자신의 도시를 소개하기 위해 애쓴 친절한 두 여성―역사박물관 직원과 여행사 직원―과의 만남은 칸달락샤의 밝은 이미지로 남았다.
칸달락샤의 세례요한탄생교회는 1526년에 세워진 후 수많은 재건축을 거쳤는데, 현재의 교회는 원래 위치 근처에 2005년 신축됐다. 사진=박성현
칸달락샤는 그 자연환경으로 인해 ‘백해의 진주’라 불린다. 칸달락샤 자연보호구역의 시초는 1932년 백해의 칸달락샤만에 있는 섬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사냥보호구역인데, 이는 북극 해안에 서식하는 물오리인 솜털오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리털은 극지탐험가들의 옷에 자주 사용됐고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이 재료의 최대 공급국이었기 때문에 솜털오리의 개체 수가 줄어든 것이다. 콜라반도는 솜털오리의 서식지 중 하나이고 칸달락샤는 콜라반도 남단에 있는 오래된 포모르 정착지다. 이후 보호구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돼 왔는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으로 보호되는 야생식물 다수와 약 260종의 새, 그리고 물범, 불곰, 담비, 엘크 등 많은 동물들이 공존하고 있다.
칸달락샤만 근처 숲속 생태탐방로에 소나무(좌)와 린네풀(우)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사진=박성현
칸달락샤가 정착지로서 문헌에 처음 언급된 것은 1517년이지만,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왔고 고고학자들은 이를 입증하는 고대 유적지들을 칸달락샤 근처의 니바강 유역에서 발견했다. 칸달락샤는 경제적,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어 철도와 해상노선이 교차하고 구소련 시절 산업과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지역이다. 이곳에는 북극권 유일의 알루미늄 제련소와 니바강의 수력발전소, 칸달락샤 해상무역항이 여전히 활동 중이다. 하지만 생선가공공장과 기계공장은 사라졌고 인구는 약 3만 명으로 줄었다. 칸달락샤 항구는 1915년에 건설됐는데 항만 창립 95주년을 기념해 설치된 예인선 시토름(폭풍, Шторм)호는 항구에 영구적으로 정박돼 한때 이 도시의 해양 영광을 증언하고 있다.
칸달락샤 항구에 영구적으로 정박돼 있는 예인선 시토름(폭풍, Шторм)호는 항만 창립 95주년을 기념해 설치됐다. 사진=박성현
일반 아파트 건물 일층에 자리한 칸달락샤시 역사박물관. 사진=박성현
칸달락샤는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1944년 동안 전선으로서의 역할을 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구소련의 역사에서 나치 독일과 싸운 ‘대조국전쟁’으로 불린다. 나치 독일은 콜라반도를 공격할 때 북쪽의 무르만스크 방향과 남쪽의 칸달락샤 방향 두 가지로 계획했다. 칸달락샤 방향은 무르만스크 방향보다 히틀러 군대의 주목을 덜 받았지만 칸달락샤를 함락하면 철도를 따라 무르만스크를 공격할 수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런 역사와 관련된 기념물이 T-34-85 탱크인데, 1941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칸달락샤 방향을 방어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1974년 도시의 중앙광장에 설치됐다. 탱크 아래 받침대에는 ‘소련 북극지방의 영웅-수호자에게 영광을’이라 쓰여 있다. 당시 유격대가 조직돼 활약했는데, 전에 언급한 적 있는 순록수송부대 중 일부도 칸달락샤에 합류했다.
도시의 중앙광장에는 1941-1944년 전쟁 당시 칸달락샤를 방어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T-34 탱크 기념물이 설치돼 있다. 사진=박성현
칸달락샤의 돌미궁 ‘바빌론’
카노제로 암각화가 있는 곳은 오지의 섬이라 칸달락샤에서 최대한 인터넷을 미리 사용하고 가려 했지만 숙소 방에 와이파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된다더니… 카메라용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클라우드에 올려 저장해야 하는데 문제가 심각했다. 일층 사무실에서는 인터넷이 됐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고 그들의 업무 공간이라 조금 시도하다 포기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러시아 체류기간에 맞춰 무제한 데이터 사용을 신청해 둔 휴대폰 심카드도 문제가 생겼다. 다시 기간 연장을 위한 구매를 해야 하는데 칸달락샤에 유일한 해당 통신사 대리점은 수리 중이라 문을 닫았다. 온라인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니 와이파이 되는 곳을 시내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왕좌왕 난감해하던 나는 일단 눈에 보이는 여행사 사무실들을 돌기로 했다. 콜라반도 사미족의 민족지적 장소인 세이도제로호수를 방문하는 투어가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는데, 카노제로 암각화에서 돌아온 후 가능하다면 찾아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들른 모든 여행사는 해외여행을 주선하는 곳이라 현지에서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설명이어서 성과는 없었지만, 대신 마지막 여행사에서 만난 직원 올랴 씨가 나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칸달락샤의 돌미궁을 안내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개인 가이드를 해 주는 것이니 당연히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녀는 극구 사양하면서 외국인 방문자에게 자기 도시의 유적을 소개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그녀의 사무실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해 심카드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중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돌미궁이 위치한 칸달락샤만 내 말라야핏쿨랴만의 풍경. 사진=박성현
다음날 일찍 퇴근한 올랴 씨는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미궁이 있는 칸달락샤만 근처에 데려갔다. 자동차가 더 이상 가지 못하는 곳부터는 걸어서 생태탐방로인 숲길을 통과해야 한다. 가는 도중 자연보호구역임을 실감나게 하는 식물들에 관한 안내판이 보인다. “이 돌더미를 보세요!” 올랴 씨가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야생 돌더미는 솔로베츠키 수용소의 수감자들에 의해 쌓였다고 하고, 다른 설에 의하면 그보다 더 오래된 고대인의 활동 흔적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도 입증된 것은 없다.
칸달락샤의 돌미궁 '바빌론'으로 가는 숲길을 올랴 씨가 안내하고 있다. 사진=박성현
혼자서는 도저히 찾기 어려운 길을 한참 걸어가니 드디어 ‘바빌론’이라 불리는 돌미궁이 나온다! 이 돌미궁은 칸달락샤만 내 말라야핏쿨랴만이 내려다보이는 곶에 위치한다. 이 곶이 작은 섬을 육지와 연결한다.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지역주민인 포모르들이 ‘구불구불한’, ‘물결 모양의’라는 뜻에서 ‘바빌론’이라 불렀다거나, 미궁의 나선형 구조가 성경에 언급된 바벨탑으로의 오르막과 닮아 ‘바빌론’이 되었다는 설, 심지어 켈트 신화의 도시(섬) 아발론의 이름에서 파생, 변형된 켈트 용어라는 설도 있는데 아발론은 선택된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축복받은 섬으로 요정이 산다는 곳이다. 미궁의 나이는 기원전 1,000~2,000년으로 추정됐지만 최근 한 연구에서는 기원후 1,000년 초기에서 중반까지로 젊게 보기도 했다. 이 미궁은 사람들에 의해 많이 해체된 형태를 20세기 중반 연구에 따라 복원한 것으로 원형을 알 수 없어 아쉽기 짝이 없다.
칸달락샤 돌미궁 '바빌론'. 칸달락샤만 내 말라야핏쿨랴만에 위치한다.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