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메일
페이스북 트윗터
(박성현의 바위그림)카노제로에서 재회한 고래와 바다사냥꾼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23)
입력 : 2024-05-07 오전 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카노제로 암각화 발견사와 주위환경
 
카멘니섬에 머무는 며칠 내내 거의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여름이지만 추운 날씨였다. 벨로모르스크서부터 고장 난 내 에어매트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더라도 역시 추웠을 것이다. 경비를 서는 박물관 파견 직원 바짐 씨가 이불을 빌려줘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밤에 숲속 텐트는 너무 추워 자다가 계속 깨야 했다. 경비원 숙소인 자그마한 통나무 오두막은 바짐 씨와 그를 보러 온 친구 드미트리 씨가 사용했는데 그 안도 춥다고 했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거친 야생 속 작은 섬이라 그런지 생활환경은 열악하다. 카멘니섬으로 이동하고 체류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받았던 박물관 측의 메일 내용이 잘 이해됐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추가: 카노제로 암각화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로도 없고 호수 주변이 늪입니다. 정착지가 없고 거주할 곳도 없으며 통신 연결도 안 됩니다. 여행: 전지형 차량, 그 후 급류가 있는 강을 따라 보트로, 그 후 호수에서 보트로 이동, 하이킹 복장 및 장화가 필요합니다.”
 
카멘니섬 암각화 보호돔의 경비와 안내를 맡은 박물관 근무자의 숙소.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의 접근성이 안 좋다 보니 일반적인 방문객보다 움바강 래프팅을 하다가 카멘니섬에 들른 사람들이 많다고 지난번에 썼었는데, 실제로 이 암각화의 발견 과정도 래프팅을 하다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배경 일화가 있다. 1997년 카노제로호수 북쪽에서 한참 떨어진 레브다마을의 향토역사박물관이 래프팅 원정대를 조직했다. 이 박물관의 설립자가 몇 년 전 레브다마을에서 카노제로호수 남쪽의 움바마을로 이사했는데,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최단 경로로 가는 여행을 도와달라고 박물관 측에 제안한 것이다. 이는 레브다마을 아래쪽의 움보제로호수를 건너 움바강을 따라 래프팅을 하는 경로로, 박물관 측이 배를 지원하고 참가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여정 4일째 되던 날 움바강 중류에 위치한 카노제로호수에 도착한다. 원정대의 일원으로 전직 박물관 직원이자 당시 역사학 전공 학생이었던 유리 이바노프는 각지에서 온 래프팅 관광객들이 카멘니섬 바위들 위에 남겨 놓은 글을 보다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솔잎 잔해 사이에서 그늘진 어두운 점을 발견했는데 그곳을 청소하자 노 젓는 사람이 있는 배의 이미지와 그 옆의 사슴 형상이 나타났다. 이것이 카멘니 그룹 1의 시작이다. 이후 고고학자들의 조사와 연구, 지속적인 발견이 이어져 현재까지 23개 그룹, 1,500여 개의 이미지가 기록됐다.
 
카멘니섬의 암각화 보호돔(카멘니 그룹 7)과 카멘니 그룹 1의 아래쪽 해안에 섬 안내판이 서 있다.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의 핵심은 1999~2000년에 발견된 카멘니 그룹 7이다. 카멘니섬의 보호돔 안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모여 있는 형상들로 600개 이상에 달한다. 이 바위에는 곰을 쫒아 죽이는 장면이 상세히 새겨져 있어 일명곰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쿠폴이라 불리는 이 투명한 돔은 자연적, 인위적 요인으로 인한 암각화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2014년 말~2015년 초에 건설됐다. 그런데 투명한 돔이다 보니 가로세로 얽힌 돔의 골조와 밖의 나뭇가지들이 그림자로 비쳐져 벽면에 전시된 암각화 도면과 사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바위의 그림들도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수많은 형상들이 복잡하게 구성돼 있어 더 알아보기 어렵다. 머무는 내내 날씨가 안 좋기도 했지만, 맑은 날의 일몰이라 해도 돔 안에 위치한 바위그림이 석양에 찬연히 빛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역시 실내에서 보호되는 백해 암각화의 베소비슬레드키(본 연재 15회 참고)와 그것을 보존하는 벨로모르스크 박물관의 파빌리온과도 현저히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그곳의 안락한 환경과 달리 이곳은 야생이니 어찌하랴. 이 보호돔을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터다. 이곳에 데려다 준 박물관 직원 아나톨리 씨의 말에 의하면, 2008년 암각화 박물관이 설립될 때 마을주민들이 많이 애썼다고 한다. 2012년에는 움바마을의 박물관에 전시실이 생겨 카노제로까지 갈 수 없는 관람객들에게 암각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외국인은 움바마을 방문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카노제로호수의 암각화 단지는 2018년부터 러시아연방 차원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보호돔 안에 있는 카멘니 그룹 7. 나무계단을 통해 부분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사진=박성현
 
북극에서 다시 만난 고래와 바다사냥꾼
 
카노제로 암각화는 카노제로호수 내 고렐리섬과 옐로비섬, 그리고 카멘니섬과 육지의 해안바위 아지노까야에 산재해 있다. 일부 지도에서는 고렐리와 옐로비가 각각 볼쇼이포드문스키와 말리포드문스키로, 카멘니는 스칼리스티 또는-오스트롭으로 표시되기도 했는데, ‘은 사미족 언어로을 뜻하고오스트롭은 러시아어로이어서곰섬이 된다. 카멘니 그룹 7 암각화의 곰사냥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카노제로호수 지역의 지명 대부분은 사미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카노제로 암각화에는 야생 순록과 엘크, 곰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많고, 콜라반도의 토착종족인 사미족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순록을 기르며 자연친화적 삶을 영위해 왔다. 사미족의 문화적 요소는 기원전 1000년경에 알려져 현대까지 이어진다. 카노제로 암각화 제작 연대와의 간극을 고려할 때 사미족의 조상이 그보다 더 먼 옛날 이곳을 스쳐가면서 바위그림을 남긴 집단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할지라도, 문화적 친연성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카멘니 그룹 7의 일부. 배에서 사냥하는 모습. 고래와 곰이 작살줄로 연결돼 있다(야간촬영).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는 면새김과 선새김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그림이 새겨진 암석은 진흙이 퇴적해 굳어진 셰일(혈암)이어서 부드럽고 쉽게 손상된다. 카노제로 암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사람 또는 의인화, 엘크와 순록, , 고래와 그 동물들을 사냥하는 장면, , 발자국, 스키 흔적 등이다. 그 밖에 바퀴와 십자 모양(아마도 도구) 형상들도 눈에 띈다. 사람 이미지 중에는 러시아 연구자들이사랑이라 명명한 남녀 커플의 모습과 잉태를 암시하는 듯한 그림이 종종 보인다.
 
카멘니 그룹 7의 일부. 작살줄이 연결된 사냥 중인 배. 10cm 측정자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야간촬영). 사진=박성현
 
그렇지만 카노제로 암각화의 주요 주제는 역시 고래사냥이다. 고래는 대부분 벨루가로 추정되는데, 대형보트에 탄 사람들이 고래를 작살로 사냥하고 있다. 한 척의 배에서 두 마리의 고래로 작살줄이 뻗어나간 그림이 있는가 하면, 두 배가 한 고래를 협공하기도 한다. 배들이 고래사냥을 하는 장면, 이 배 저 배에서 던져진 작살줄이 휘어진 모습은 여러 척의 배가 고래를 포위하고 협동작전을 펼치던 백해(비그강 하구) 잘라브루가 암각화의 고래사냥을 연상시킨다. 이 바다사냥꾼들은 백해의 아북극 지역에서 북극으로, 더 멀리 바렌츠해로 고래를 쫓아 이동해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해의 비그강 암각화 주변에서 신석기인의 정착지 유적이 나온 반면, 카노제로호수 근처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백해 암각화의 제작 집단이 비그강 하구에서 장기간 거주했다면, 카노제로호수에 암각화를 남긴 집단은 호수의 섬들을 일시적인 거점으로 활용했던 게 아닐까? 자연지형상 이곳의 생활여건이 훨씬 어려우니 말이다.
 
경비원의 베이스캠프, 코르돈의 외딴 풍경
 
카멘니섬에서 배로 약 15분가량 가면 박물관의 코르돈이 있다. ‘코르돈은 경비대의 저지선 내지 경계선을 뜻하는데, 카노제로호수에 파견된 박물관 직원들이 경비 교대를 하고 쉴 수 있는 일종의 베이스캠프다. 카멘니섬에는 모든 것이 두절돼 있지만 코르돈에서는 전화 통화가 가능하고 매우 느리긴 하지만 배터리 충전도 할 수 있다. 카메니섬에 도착한 날 저녁, 경비를 서는 바짐 씨가 코르돈에 간다고 하기에 궁금해서 따라나섰다. 카멘니섬에 올 때 탔던 배는 아나톨리 씨가 코르돈으로 몰고 간 상태라 그보다 더 작은 고무보트로 출발했다. 뭔가 성능에 문제가 있는 듯했지만 그게 섬에 있던 유일한 보트라서 달리 방도가 없었다. 가는 내내 비가 흩뿌리고 바람이 심해 파도가 바로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출렁인다. 낮은 배는 요동을 친다. 스릴감과 공포감이 동시에 들었다. 안전 때문에 촬영을 하지 못한 게 유감이었다.
 
박물관 코르돈(경비 근무자의 베이스캠프)의 부엌에서 대화 중인 아나톨리 씨(좌)와 바짐 씨(우). 창문 너머로 호수가 보인다. 사진=박성현
 
코르돈은 호수 바로 옆에 작은 나무오두막으로 지어져 있다. 앞뜰에 풀과 나무와 야생화가 피어 있는 풍경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뜰 한쪽에는 러시아식 사우나 욕실인 작은 바냐도 만들어 놓았다. 근무기간 동안 이곳에 혼자 머무는 아나톨리 씨가 코르돈을 안내해 주고 빵과 차를 대접해 준다. 부엌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아나톨리 씨와 바짐 씨 뒤 창문 밖으로 그림 같은 호수가 보인다. 코르돈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마치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박물관 코르돈(경비 근무자의 베이스캠프)의 모습.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신상민 기자
SNS 계정 : 메일 페이스북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