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가에는 '외교 언어'라는 고유의 문법이 있다고 합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말 한마디의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외교 언어는 국가 간 동맹을 강화하기도,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빛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외교가에서는 정확히 적용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잘못된 말 한마디가 국가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고, 오래된 역사 속에서는 전쟁을 발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상대국을 대상으로 한 언어는 신중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외교부는 상대 국가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원론적인 수준의 언어만 사용합니다.
우리 대법원이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피고 기업의 책임을 인정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극히 유감스럽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크게 반발했습니다.
우리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개입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외교 언어'는 원론적이었습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일간 주요 현안에 대해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며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외교부는 이러한 원론적 입장만 밝힙니다.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소통 창구를 통해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윤석열정부의 '외교 언어'가 조심스럽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같은 '외교 언어'는 일본에 국한된 듯합니다.
지난달 27일 임 대변인은 "한·러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러시아 측이 실수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라며 "러시아 측이 북한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안보리 상임이사국답게 처신하기를 바란다"고 직격했습니다.
그간 임 대변인이 일본을 대상으로 보여왔던 '외교 언어'와는 상반되는 강한 어조입니다. '경고'와 '처신' 등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단어입니다.
사실상 러시아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분쟁을 관리하는 데 있어 최선의 방법은 위협과 적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러시아를 '적'으로 설정한 게 아니라면 신중한 '언어'를 사용하고 소통 채널을 통해 한러 관계를 관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