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염현석기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하경제 양성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가짜·탈세석유 근절’이다. 현재 가짜·탈세석유로 인한 세금 탈루액은 최소 1조원에 이른다. 이를 국민에게 유류세 해택 등으로 돌려준다면 리터(ℓ)당 150원의 기름값이 인하된다. 하지만 가짜석유를 근절하겠다는 정부와 석유제품 유통업계가 서로 이견을 보이면서 신경전만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뉴스토마토>에서는 가짜·탈세석유 근절에 대한 업계와 정부의 입장 차이, 근절정책의 문제점 등을 진단하고, 합리적인 근절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 일환인 '가짜·탈세석유 근절책'을 놓고 석유제품 유통업계와 정부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와 업계는 가짜·탈세석유 '근절'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각자의 잇속과 편의만을 위해 밥그릇 챙기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4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가짜·탈세석유 근절책' 관련 ▲수급보고 전산화 시스템 ▲노상검사 강화 ▲한계 주유소 지원책 부실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시행 전부터 논란..'수급보고 전산화'
수급보고 전산화 정책은 전국의 모든 주유소와 판매소의 석유제품 이동량을 매일 모니터링 하는 시스템이다.
시범사업 기간을 걸쳐 오는 2014년 9월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업계와 정부의 갈등 심화로 정책의 개념만 있을 뿐 세부사항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정부는 이 시스템을 통해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가짜휘발유에 대한 근절을 자신하고 있다. 면세유, 유가보증금 등 탈세에 용이한 항목까지 모니터링으로 적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수급보고 전산화 시스템으로 경유와 등유를 섞어서 제조한 가짜경유 적발이 용이해졌다"며 "면세유 이동량, 이중 유가 보조금 지급 등도 모니터링 할 수 있어 연간 1조원가량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수급보고 전산화 정책의 실효성 문제를 제기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최근 주유소협회가 전국 1만3000여개 중 절반에 해당하는 6427개 주유소가 참여한 '수급보고 전산화' 정책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회원사의 95%가 수급보고 전산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반대 이유로는 '정책의 실효성 없음'이 전체 응답자의 32%로 가장 많았고, '영업비밀 침해 우려', '과다단속 우려', '잠재적 범죄자 취급에 대한 우려' 순으로 뒤를 이었다.
김문식 한국주유소협회장은 "석유업계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 정책의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면서 "정부가 정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예상 문제점에 관한 대비책이 없어 협조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업계 "가짜경유 적발할 수 없다"
한국주유소협회와 한국석유유통협회는 정부의 '가짜·탈세석유 근절책'의 핵심인 '수급보고 전산화'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장하는 물량 이동 비교만으로는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등유와 경유를 혼합한 가짜경유를 적발할 수 없다고 맞섰다.
◇지난해 가짜석유를 팔다 적발돼 영업정지 중인 서울의 한 주유소 전경
주유소에서 정상 석유제품을 구매한 후, 홈로리 이동판매 차량을 통한 '게릴라식 거래'가 이뤄지고 있어 주유소 거래량으로는 적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업계는 수급보고 전산화 대상은 고정주유기로 한정돼 있어 이동판매 차량에 설치된 주유기로는 전체 가짜경유의 97%를 차지하는 '게릴라식 가짜경유' 단속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석유유통협회 관계자는 "홈로리 이동 차량의 경우 중고차 시장에서 3000만~4000만원 정도면 누구든지 구입할 수 있어 전산화 시스템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며 "'수급보고 전산화'와 같은 탁상공론식 정책보다는 '노상검사 강화' 등 실질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수급보고 전산화의 일일보고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정부는 석유제품 판매주기가 평균 3~4일로 현행 보고 주기인 월 단위 보고로는 단속가치가 없다며 업계에 '일일보고'를 강요하고 있다.
이에 업계는 정부가 업계 상황을 간과한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주유소가 정유사로부터 석유제품을 공급받는 주기는 평균 2~4주여서, 월 단위 보고 만으로도 충분히 단속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진형 한국석유유통협회 상무는 "정부의 과도한 정보 수집으로 영업비밀 누설은 물론, 회원사 대부분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법적인 보장과 보완책 없이는 '수급보고 전산화'시스템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유류세..한계주유소 지원책도 있어야
기승을 부리는 가짜석유에 한 근본적인 원인을 학계·업계·정부는 '과도한 유류세'로 꼽았다.
◇3월 첫째 주 유종간 판매가격 구성
특히 가짜석유 유통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경유에 등유를 섞는 가짜경유는 유종 간 유류세 차익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으로 알려졌다.
경유는 리터(ℓ)당 690원, 등유는 230원의 유류세가 부과돼 경유와 등유를 혼합해 만든 가짜경유는 ℓ당 230원가량의 유류세 차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창의 관동대학교 교수는 "가짜석유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결국 비싼 유류세 때문"이라며 "정부나 업계가 무슨 대책을 내놓더라도 유류세가 인하되지 않는다면 가짜석유는 여전히 기승을 부릴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주유소협회는 최근 경기악화로 인한 한계 주유소들이 속출해 이들 주유소가 가짜석유 업자들의 주요 제조처가 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1월 가짜석유를 팔다 적발된 경기도 화성시의 한 주유소의 경우, 운영이 어려워진 주유소를 인수해 가짜경유를 제조 판매해 매달 1000만원가량의 불법소득을 올렸다.
화성시 관계자는 "이 주유소 업주는 보통 경영상황이 어려운 한계 주유소를 임대하거나 인수해 가짜경유로 소득을 올리고 되파는 형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며 "적발 전 주유소를 경매 처분했다"고 말했다.
화성시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이모 사장은 "가짜석유 제조는 주로 경영이 어려운 주유소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이들 주유소는 2억원이 넘는 폐업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가짜석유 업주들의 좋은 사냥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계 주유소의 정리 없이는 가짜석유 근절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는 가짜석유 근절을 위한 제도마련이나 단속강화보다는 가짜석유의 근거지인 한계 주유소들의 대비책을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