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출가 박근형의 연극을 보면 삶의 가혹함에 대비해 미리 백신을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무대는 삶에서 벌어질 법한 모든 일을 가차 없이 다룬다. 아이가 아이를 낳고, 아버지는 집에서 목을 매달고, 아내는 남편의 출타 중에 외간 남자의 아이를 배는 등 심란한 일 투성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혹하기 그지 없는 상황들이 별 거부감 없이 흘러간다. 마치 질병예방을 위해 미량의 바이러스를 투여 받는 것처럼 어딘가 찌릿한 기분 속에 관객은 연극이 삶을 치유하는 과정을 기꺼이 겪어내게 된다.
극의 소재나 줄거리를 보면 꽤나 자극적인데, 희한하게도 막장드라마처럼 식상하지는 않다. '당신도 여러 사람 심란해질 일을 벌이라'고 자극적으로 권유하거나 혹은 과장된 신파조로 삶을 위로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박근형의 연극은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다. 그 대응 방식이 등장인물에게는 성격을 부여하고, 관객에게는 객관적으로 삶을 곱씹어볼 만한 계기를 제공한다.
(자료제공=극단 골목길)
선돌극장의 기획공연으로 공연 중인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제목의 신작 또한 이 같은 맥락에 있는 작품이다. 극장에 들어선 관객은 여지 없이 '박근형 표' 신종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무대에는 회장님 댁에 얹혀사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집안의 가장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모시던 회장님을 따라 출장에 다녀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그런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내가 아들 친구이자 회장님 아들의 아이를 뱄다는 소식이다. 여기에 아들의 입영과 딸의 결혼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무대 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펼쳐진다.
삶을 위한 백신용 바이러스는 다행히 무차별적으로 살포되지는 않는다. 이야기가 다소 뜬금 없이 한바탕 질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극작술은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는데, 그 방식이 자못 흥미롭다. 극의 논리는 마치 숨겨뒀던 그물망과도 같이 서서히 떠오른다. 표면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이 극과 등장인물들이 현실 사회와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맺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표면적 줄거리는 어느 가난한 콩가루 가족의 이야기이나 관객은 각 인물들의 처한 상황을 실마리 삼아 분단 현실과 자본주의 사회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된다. 느닷없이 언급되는 프랑스 여배우의 이름도, 피리를 부는 사나이도, 선구자의 노래도 무대 위에서 모두 이해할 만한 것이 된다.
박근형의 바이러스가 치명적이지 않게 하는 것은 황당함에서 비롯되는 유머코드와 아이러니다. 유머와 아이러니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더욱 또렷해진다. 어머니에 대한 엉뚱한 증언을 강요 받는 딸(이봉련 분)의 끙끙대는 모습, 입영영장을 마주한 아들(유승락 분)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회장님과 가족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검사 사위(전운종)의 전전긍긍하는 모습, 아내의 불륜을 덮기로 결정한 아버지(윤제문 분)의 술잔 내려놓는 방식, 묘하게 설득력을 띈 어머니(신사랑 분)의 변명 등이 어우러지면서 극은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느닷없이 웃음보 터지게 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종의 결정 혹은 결단의 과정을 그리는 도중 배우들이 선택한 연기들이 관객의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긴다.
<피리 부는 사나이> 속 엽기적이면서도 남루한 사회와 가정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하다. 작품은 삶의 가혹함을 미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게 함으로써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연극을 보고 나면 적어도 무엇이 나의 삶의 조건을 어렵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게 된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타협점을 선택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관객도 자신의 선택할 몫에 대해 곰곰이 떠올려 보게 된다.
작·연출 박근형, 출연 윤제문, 박완규, 이봉련, 전운종, 유승락, 신사랑, 조명디자인 라성연, 음악 박민수, 피리지도 한충은, 무대·소품·의상·분장 극단 골목길, 8월4일까지 선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