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예배나 기도가 마음의 평화를 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한다." 무슨 말씀인가? "신앙을 생명같이 여기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다."
지난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국 교회 지도자 초청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이 주고받은 대화의 한 대목이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로마시대 초기나 조선시대 후기에서나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되풀이된다.
같은 자리에서 한국교회총연합회장은 "예배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일부 목사님들은 거리집회 금지와 대면예배 제한에 대하여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반박하였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예배가 과연 본질일까? 마스크를 끼고 찬송가를 부르기도 어려우니 "당분간 비대면으로 예배하라"는 명령이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일까? 종교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살펴 볼 일이다.
1987년의 대한민국 헌법(제20조)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제1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제2항)"고 규정한다. 종교의 자유에서는 믿음(신앙)의 자유가 핵심이다. 신앙은 '양심의 자유'(제19조)와 함께 국가권력이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 조직과 집회 및 전교와 같은 활동은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제37조 제2항).
기도는 절대적 보호를 받는 신앙의 자유에 속하지만 다중이 모이는 예배·미사·예불은 그렇지 아니하다. 대외적 또는 상호간 경배 행위에 대한 제한을 종교박해로 주장함은 짜릿하고 선명한 정치적 선동과 맥락을 같이할 수 있겠으나 기본권의 제한과 그 한계를 규정한 헌법(제37조) 정신과 맞지 아니한다.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교인들의 정치집회도 정교분리의 원칙에 반하며 종교의 자유로 보장될 수 없다.
가톨릭, 불교 또는 원불교 등에서도 개신교회의 예배와 같은 미사나 예불 또는 종교의식이 있음에도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다"는 항의가 잘 들려오지 않는데, 개신교회만 유달리 같은 항의를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는 같은 기독교요 같은 성서를 사용함에도 왜 대면 예배·미사의 제한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다른가? 불가사의하다.
기독교단이 교리를 내세워 스스로와 공공복리를 위협함은 뿌리가 깊다. 기독교가 때로 유아독존처럼 비치는 배경은 도전과 응전으로 세계사를 분석한 아놀드 J. 토인비 박사의 '역사의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구약의 창세기(1:26-30)를 "신은 스스로 창조한 것 중에 인간 이외의 일체를 인간의 자유에 맡겨 인간이 좋을 대로 이용할 것을 허용했다"고 해석하면서부터 서구 기독교 문명은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공공복리에 대한 외면의 길을 걸었다.
여의도에 있는 어느 초대형 교회는 오래 전부터 넘치는 교인들로 인하여 본당에서 예배를 올리지 못하고 설교하는 담임 목사님을 영상으로 중개하는 별실에서 예배를 올려도 헌금만 잘 내면 출석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주말 헌금을 직접 헤아리기 어려워 가마니보다 큰 서너 개의 커다란 자루에 담아 인근 투자신탁 등으로 옮겼다.
일부 교계의 저항은 자발적으로 올리는 비대면 예배는 괜찮은데 타의로 올리는 비대면 영상 예배는 탄압이라는 말로 들린다. 종교의 자유가 목숨과 바꿀 수 없음은 누가 부정하겠는가? 기독교 교리와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몰랐던 신앙 때문에 페스트가 창궐하는 와중에 성당에 모여 미사를 올림으로써 몰살의 비극을 겪었다. 비대면으로 예배를 올리라는 제약은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조치가 아니라 교인들 스스로와 공공복리를 위한 필요최소한의 제한이다.
눈치 없는 세균들이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면, 일제의 가미카재(神風) 특공대처럼 "적을 물리치고 나도 죽겠다"는 오해를 낳고 싶지 않다면, 또 정교분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탈출과 도주 그리고 은닉을 일삼는 왜곡된 신앙과 전교를 멈추고 "신 앞에 나서는 실존(實存)"으로 절대자의 뜻을 헤아리고 정계 지도자들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눈앞에 닥친 세균의 침공을 먼저 방어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