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북유라시아의 바위그림을 찾아 떠나다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①)
2023-11-06 06:01:03 2023-11-13 15:09:03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차 안 풍경
 
2023년 7월 4일 저녁 8시 10분, 드디어 기차가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을 출발했다. 한국에서 러시아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페트로자보츠크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 직전까지 일을 처리하고 남은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나는 헐레벌떡 뛰어 간신히 기차에 올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째 계속되는 상황이니 해외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 한국에서는 아무 것도 예약할 수 없었다. 러시아 친구 레나의 도움으로 첫 번째 기차와 첫 번째 시외버스는 예매했지만, 일정을 원활히 진행하려면 교통편과 숙소 예약에 필요한 러시아 인터넷은행 카드를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게다가 미처 챙겨오지 못한 측정용 기준자(스케일바)도 만들어야 했다.
 
배낭 두 개를 둘러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객차 내 통로를 지나가는데, 내 몰골 때문인지 승객들이 하나둘씩 쳐다보기 시작한다. 객차 안에는 군복을 입은 청년들도 여럿 앉아 있다. 그들은 여행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매우 절제된 행동과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른 승객들을 대하는 듯이 보였다. 이층 침대인 내 자리에 짐들을 올리기 위해 낑낑대자 그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도와준다. “고맙습니다. 군인이신가요?” 아뿔싸, 착잡한 마음에 뻔한 질문을 던졌다. 가뜩이나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진다. “네.” 기차 안 공기가 무겁다.   
 
돌아온 군인들과 가족의 상봉. 페트로자보츠크 기차역. 사진=박성현
 
암각화 여정의 시작
 
북극권과 그 바로 아래 지역의 바위그림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시작됐다. 기본 목적지는 필자의 연구 주제인 유럽러시아 북부에 위치한 암각화군 세 곳으로, 카렐리야공화국의 오네가호수와 백해로 합류하는 비그강 하구 그리고 콜라반도에 위치한 무르만스크주의 카노제로 암각화들이다. 여기에 보태, 이후 여건이 허락될 경우 노르웨이의 알타 암각화와 핀란드의 아스투반살미 암채화까지 둘러볼 예정이었다. 러시아 근처라서 욕심을 내긴 했지만, 약 한 달 후 나는 결국 알타 답사까지로 만족하고 핀란드의 바위그림은 ‘언젠가’를 기약하며 헬싱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버스를 타게 된다. 물론 여정의 출발점에서는 답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었는데, 전쟁으로 인한 제약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정 내내 따라다닌 비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암각화는 바위 표면을 쪼거나 갈아 파거나 그어서 형상을 새긴 것을 뜻한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암면미술(rock art, 바위미술)은 ‘새겨진’ 암각화(petroglyph)뿐만 아니라 ‘그려진’ 암채화(pictograph, 그림문자)도 포함한다.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바로 채색돼 그려진 암채화이다. 한국에서는 암채화가 발견되지 않아 보통 바위그림이라 하면 암각화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대상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가 있다. 그외에 포항 칠포리, 고령 장기리, 안동 수곡리, 경주 석장동 등 여러 암각화 유적지들이 존재한다. 
 
다음날인 5일 아침 9시 58분, 기차는 페트로자보츠크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려서는데 갑자기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린다. 어제 심란한 마음으로 앳된 군인들을 보며 혹시 참전 병사들일까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돌아온 이들이었다. 모스크바를 거쳐 페트로자보츠크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살아 돌아온 아들, 남편을 맞이하는 가족의 기쁨이야 오죽하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청년들이 언제까지 사지에 몰려야 이 전쟁이 끝날 것인가. 나는 다시 복잡한 심정으로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페트로자보츠크 향토박물관에서의 예습
 
역에는 친구 미샤의 지인인 알렉산드르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의 안내 덕분에 나는 드디어 현금 자동 입출금기를 찾아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 수령한 은행카드에 돈을 일부 넣었다. 인터넷은행이라 현금입출기를 찾기 쉽지 않은 게 문제였는데, 이제부터는 직접 모든 것을 예약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씨는 기차역에서 카렐리야공화국 국립박물관(페트로자보츠크 향토박물관으로도 불린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스쳐 지나가는 도심의 건물들과 자신의 도시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다. 감사 인사와 함께 박물관 입구에서 그와 헤어진 후 나는 부지런히 암각화를 찾아 발길을 재촉했다. 이 박물관은 카렐리야 지역의 역사와 자연을 볼 수 있는 풍부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어 꼭 관람할 만한데다가, 무엇보다도 오네가호수에서 가져온 바위가 전시돼 있어 더욱 그러했다. 약 세 시간 후 푸도시행 버스를 타야 하는 나로서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먼저 보고 남은 시간을 나머지 전시물에 할애할 예정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카렐리야의 옛 모습. 사진=박성현
 
페트로자보츠크는 카렐리야공화국 수도이다. 카렐리야 지역은 오래전 카렐리야(카렐리야어와 핀란드어로는 카리알라) 사람들의 땅이었으나 긴 시간 동안 핀란드와 러시아, 스웨덴 사이에서 분쟁의 역사를 겪어온 곳이다. 이런 분쟁은 12~13세기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공국(러시아 북부) 사이 전쟁을 비롯해 소련 시절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카렐리야인은 핀-우그르계에 속해 있어 핀족인 핀란드인 그리고 언어도 핀란드어와 더 가깝지만, 핀란드와 러시아로 나뉘어 살아오다 보니 러시아 쪽 카렐리야인들은 러시아 문화권에 속하게 됐다. 카렐리야공화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종종 상대방이 카렐리야인인지 그 언어를 아는지 물어보았는데,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들도 카렐리야어를 아는 경우는 드물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사본. 사진=박성현
 
향토박물관은 카렐리야를 공부하기에 큰 도움이 되는 곳이지만 아무래도 암각화가 먼저다 보니 관련 전시실에서 시간을 꽤 써 버렸다. 아직 오네가호수에 있는 원본을 보지 못한 상태라 벽면에 재현된 암각화 사본만 보아도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호수에서 직접 운반돼 온 바위 조각은 총 세 개인데, 둘은 나란히 놓여 있고 하나는 구석에 홀로 있다. 그런데 원본인 이 돌들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것일까? 이 두 돌의 발견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오네가호수 기슭에서 작업하던 고고학 탐험대가 수년 동안 식탁으로 사용하던 크고 평평한 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석판 안쪽을 따라 손을 뻗었다. 그들이 그 돌을 뒤집어 보자 고대 예술가들이 보았을 ‘천체’가 나타났단 것이다. 고고학 탐험대가 그때 발견한―바위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돌들 중 두 개의 암석 조각이 푸도시 시립박물관을 거쳐 2009년 이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구석에 홀로 전시된 나머지 한 조각은 1935년 오네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는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겨진 여러 파편들 중 하나라고 한다. 에르미타주 원정대는 오네가호의 암각화 일부를 가져갈 때 바위를 억지로 떼어 내기 위해 폭파해 버렸고 이 일은 큰 오명으로 남아 있다. 카렐리야 국립박물관장은 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것을 ‘범죄’라고 표현했다. 단 한 명의 고고학자도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어떤 학자와의 논의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전문적 준비 없이 ‘폭파’란 황당한 방식을 취하는 바람에 많은 바위그림이 파괴, 소실된 것은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폭발로 인해 독특한 출산 장면이 파괴됐다고 전해지니 더욱 그러하다. 
 
오네가호수 페리노스 VI 지점에서 옮겨 온 암각화(바위 조각 1, 2)_카렐리야공화국 국립박물관(페트로자보츠크 향토박물관).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인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