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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신호’를 만드는 담대한 도전
2016-01-07 10:53:32 2016-01-07 10:53:35
 “다른 아무것도 없이 온전히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정적의 시간이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하다.”
 
책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 나오는 말이다. 바둑은 한 수를 둘 때마다 상황이 바뀌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소 과장돼 있다고 하더라도 매순간 전략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정치가 이 책으로부터 배워야 할 대목은 꽤 있는 것 같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프로 바둑기사 최택(박보검) 캐릭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왜 자신을 정적 속에 놓아두어야 하는지를 잘 그려낸다.
 
하지만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정적의 시간을 갖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수많은 소음들을 좇아 바삐 내달린다. 정치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하루에만 몇 개 혹은 몇십 개의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녹초가 되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무성한 소음의 숲 위로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 같은 신호를 움켜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찍이 손자가 “전략 없는 전술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고, 전술 없는 전략은 패배로 가는 소음”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란스러움은 최선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겐 가장 뼈아픈 적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된다. 특히 소셜미디어 시대엔 수많은 정보들이 우리가 일부러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온다. 정치적 이슈가 제기될 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싶어 하는 팩트로 편견을 강화한다. 확증편향(confirming bias)이 극대화된다. 확신범들은 팬덤을 형성하고 말은 더욱 거칠어진다. 편향이 급기야 폭력적 소음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소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 해 말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로 국민들의 자존심을 할퀸 정부를 비롯해 집권여당으로서 추진력도 협상력도 제로가 된 선거전문 식물정당 새누리당, 나아가 큰 승부를 앞두고 분열해 서로를 헐뜯고 있는 야권에 이르기까지 소음만이 무성하다. 이 마당에 북한은 기습적인 핵실험으로 평화를 바라는 인류의 기대를 배신한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구원의 신호는 퇴행과 붕괴의 소음에 파묻힌 상황이다. 제2 조선망국론의 경고도,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절망도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치권은 올해 성년이 된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총선이 그것이다. 이번 총선 최대의 관심사는 야권의 분열이다.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관심사에서 멀어진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지만, 사실은 대승을 목전에 둔 자의 표정관리에 불과하다.
 
진짜 상대를 잃어버린 야권은 가짜 상대와의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 이번 총선의 의미가 무엇인지,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핵심 전략과 메시지는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마치 두더지게임하듯 상대의 행동을 망치로 때려눕히느라 자신의 가슴에 멍이 드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이희호 여사 논란을 보자. 이희호 여사가 안철수 의원을 만나 얼만큼의 시간을 보냈는지, 그것이 문재인 대표와 만난 시간보다 긴 지 짧은 지가 정말 중요한가. 한 언론이 이 여사가 안철수신당을 지지했다고 말한 사실을 두고 주도권 경쟁을 벌일 만한 사안인가. 이희호 여사는 야권이 제대로 경쟁력을 갖춰서 새누리당의 확장을 저지하고 2017년 대선에서 집권하길 바라지 않겠는가. 냉정하게 돌아보면 이 같은 행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누구의 이미지를 팔아서 정치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시대정신을 읽고 두려움 없는 용기와 행동하는 지성으로 그 모진 난관을 돌파해 온 것 아닌가. 그런 김 전 대통령조차 정계은퇴라는 긴 정적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적전 분열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이왕 갈라진 야권은 유치한 상호비방이 아니라 통큰 경쟁을 벌여야 한다. 통큰 경쟁이란 시대정신을 읽고 전략적 목표를 분명히 한 다음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이다. 먼저 20대 총선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의미를 규정해야 거기에 맞는 의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일례로 KBS의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순서대로 여가와 취미, 출산, 꿈, 결혼, 인간관계를 포기할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정치인이라면, 집권을 꿈꾸는 정당이라면 출산과 꿈과 결혼과 인간관계를 포기하지 않고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청년들의 미래를 만들고 싶지 않은가. 사회적 약자를 절망으로 내모는 극단적인 소득 불평등의 시대를 넘어 공정한 기회와 분배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담대한 계획을 둘러싼 진짜 경쟁으로 국민을 감동시킨다면 ‘신의 한 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이 구원의 신호를 찾기 위한 정적의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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