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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배우 정진영 "'할배파탈' 별명? 황송하죠"
2016-03-21 11:40:29 2016-03-21 11:40:47
[뉴스토마토 정해욱기자] '할배파탈'. 배우 정진영(52)이 22일 종영한 MBC 드라마 '화려한 유혹'을 통해 얻은 별명이다. 이 드라마에서 자수성가한 70대 정치가 강석현 역을 연기한 정진영은 때로는 카리스마 넘치고, 때로는 자상한 노년의 매력을 발산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후배 여배우 최강희와의 멜로 연기를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덕분에 인터넷에 팬 커뮤니티까지 생겼다"며 웃어 보였다. 드라마 촬영을 마친 정진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MBC 드라마 '화려한 유혹'에 출연한 배우 정진영. (사진제공=FNC엔터테인먼트)
 
-'화려한 유혹'은 50부작 드라마다. 극 중 연기한 인물이 45회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됐는데.
 
▲30회를 찍을 때 이미 죽을 줄 알고 있었다.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나의 운명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준비하고 있었던 죽음이다. 다른 배우들은 촬영이 안 끝났는데 나만 촬영을 마치니 다시 촬영장에 가야할 것 같고 이상하더라. 그래서 드라마를 잊고 빨리 털어버리기 위해 태국으로 여행을 갔다왔다.
 
-최강희와의 멜로 연기가 화제였다.
 
▲캐스팅 단계에서 제작진이 멜로가 있다고 했는데 잘 믿지 않았다. 캐스팅을 하기 위해 뭔 말을 못하겠냐.(웃음)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깊고 진하게 멜로 연기를 한 것 같다. 연기를 하면서 집중해서 사랑을 느끼려 했다.
 
-그동안 멜로 연기를 보여준 적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멜로 연기가 어렵지는 않았는지.
 
▲배우들은 멜로를 꿈꾼다. 사랑이라는 것은 가장 순백의 감정이다. 연기를 할 때 그냥 상대방을 사랑하면 되지 않나. 사실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자 파트너도 별로 없었다. 극 중에서 어린 여성과 사랑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배우의 임무이기 때문에 대본대로 열심히 사랑을 했다. 멜로 연기가 힘들진 않았다. 최강희를 보면 눈이 사랑으로 가득 찼고, 내 마음을 안 알아주면 눈물이 나고 그러더라. 그런 느낌을 느낀대로 표현했다.
 
◇정진영은 '화려한 유혹'에서 배우 최강희와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MBC)
 
-드라마와 극 중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힘들었지만 굉장히 즐겁게 찍었던 작품이다. 생각지 못했던 좋은 반응을 보내줘서 고맙다. 그런데 다음에도 이럴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 그러면 바보가 되는 거다. 그냥 예전과 똑같은 자세로 연기를 할 것이다. 나는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연기를 해온 배우가 아니다. 이후에도 인기나 성공을 위해서 연기를 할 생각은 없다. 하던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할배파탈'이라는 별명은 마음에 드나.
 
▲황송하다.
 
-지난 1988년 데뷔 후 여러 작품에 출연했는데 이번 드라마는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지.
 
▲사실 40대 후반에 약간의 갱년기가 왔었다. 기간은 2~3년 정도였다. 당시에 계속 일을 하고, 천만 영화도 찍었지만, 허무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게 작년 봄, 여름 쯤에 진정이 됐다. '화려한 유혹'은 그 후 내가 맞이한 첫 작품이다. 극 중 캐릭터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인물이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갱년기를 거친 내 경험 때문에 캐릭터의 내면에 근접할 수 있었다. 나이 먹은 배우가 되면 그게 좋다. 그 전엔 절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배우로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작년 말에 연기상을 탔는데 시상식이 끝나고 전화기를 켰더니 내 절친의 부고가 들어와 있더라. 이제 그런 나이다. 배우란 직업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경험을 나의 감정으로 표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간접 경험을 아무리 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나이 때 사람들의 감정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감정을 필요한 역이라면 훨씬 더 진하게 연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바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의 변화에 맞춰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 것에 대해 불평하다 보면 내가 '꼰대'가 되는 거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을 둬서 이세돌이 지는 세상이다. 내가 옛날에 바둑을 두던 때만 생각하면 내 스스로가 못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자고 항상 생각한다.
 
◇'할배파탈'이라는 별명으로 사랑을 받은 정진영. (사진=MBC)
 
-20~30대 때와 비교했을 때 연기 면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마 30대 때보다 연기가 더 넓어졌을 것이다. 나는 20년을 더 살았고, 더 많은 사람을 알았고, 더 많은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예전에는 논리적인 연기 방법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연기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본에서 그려지는 심리적 추이가 논리적으로 맞을 필요는 없다. 감정으로 맞추면 된다. 드라마에서 비서가 차를 내오면서 "차 드세요"라고 한다면 거기에 "왜 또 달래는 거야?"라든가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야?" 등의 감정이 다 들어 있다. 이번 드라마를 찍으면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춰 연기를 했다.
 
-평소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예전에 다친 다리 때문에 요즘에는 등산도 못한다. 의사도 러닝머신을 삼가라고 하더라. 그동안 배가 안 나오게 의무적으로 운동을 했는데 최근 몇년 간은 못했다. 그래서 배도 나왔다.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는데 이 나이에 조인성 같은 근육질 몸을 갖고 있으면 이상한 것 아니냐.(웃음) 체력도 결국 정신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유혹'을 통해 호흡을 맞춘 정진영(오른쪽)과 최강희. (사진=MBC)
 
-배우로서 약 30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 배우라는 직업이 마음에 드나.
 
▲사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덕후'에 대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인터넷 용어 '덕후'(한가지 분야에 열광하는 마니아)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몇 년전이었는데 순진하고 모범적인 청소년이었던 우리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 "아빠 저 입덕(연예인 또는 만화 캐릭터의 덕후가 되는 것)했어요" 그러더라. 내가 알고 있던 '덕후'는 사회 부적응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게 아니더라. '덕후'의 한 특질은 '대가와 무관한 것에 대해 헌신하는 열정'이라고 하더라. 무지하게 멋있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그 일은 소용이 없는 일이야, 도움이 안 되는 일이야"라고 하는데 우리 인생을 좁히는 말이다. 세상에는 내게 의미 있는 일과 내게 의미 없는 일들이 있을 뿐이다. 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직업도 그렇다. 배우란 직업을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의 삶에 필요한 재화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재밌게 할 수 없다. 내가 연기를 함으로써 내가 못 가본 세계나 닿지 못했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배우로서 나의 수준을 조금씩 높여가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앞으로의 목표는.
 
▲이제 20대 역할은 못하고, 30대 역할도 점점 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안 해왔던, 또 할 수 없었던 나이 든 역할을 연기할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면 영광스럽게 일을 해보겠다.
 
정해욱 기자 amorr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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