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7화)녹두장군이 살아나는 시대
“이 불타오르는 사람 보라”
입력 : 2016-12-26 06:00:00 수정 : 2016-12-26 06:00:00
11월 후반부 들어 또다시 시작된 조류독감으로 인해 축산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2003년 처음 발생한 이래 이른바 ‘AI’라 지칭되는 조류 인플루엔자가 매번 반복되는데도, 정부는 가스나 약물의 사용 없이 생매장하고 때려잡아 죽이는 비인도적 ‘살처분’만 하고 있다. 어떤 재난이 닥쳐도 ‘컨트롤타워’ 따위는 없는 정부이다 보니 그 대처방식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지만, 2000만 마리 이상의 닭과 오리들이 끔찍하게 생매장 당하는 모습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겪어온 수많은 학살들을 상기시킨다. 쌀농사를 짓는 농민도, 닭을 기르는 농민도 얼굴을 펴기 힘든 나날들이다.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 녹두장군의 후예들
사이버 시대, 인터넷 혁명의 시대인 21세기, 2016년 11월에 녹두장군이 돌아왔다. 국정농단의 주범들 중 한 명인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요구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들이 ‘전봉준 투쟁단’(이하 ‘투쟁단’)의 이름으로 트랙터를 몰고 온 것이다. 투쟁단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동군은 11월 16일 경남 진주시청 앞에서 출정식을 열어 출발했고 서군은 11월 15일 전남 해남 군청 앞에서 농기계 상경 투쟁을 선포하고 출발했다. 투쟁단이 발표한 '쌀값 대폭락, 백남기 농민 폭력 살인, 농정파탄, 국정농단 범죄자 박근혜 퇴진 농민 선언문'은 이미 그 제목만으로도 농민들이 왜 농기계를 몰고 서울로 와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농민들의 주름지고 그을린 얼굴 아래, 그들의 가슴에는 전봉준 장군의 초상이 붙어 있었다.
 
11월 25일 ‘농정파탄 국정농단 박근혜 정권 퇴진 전국 농민대회'와 청와대 행진, 그리고 26일 촛불집회를 위해 상경 중이던 '제2 동학농민군'(전봉준 투쟁단)은, 그러나, 경찰에 의해 25일 안성과 양재 IC에서 불법 봉쇄를 당해 길바닥에서 밤을 지새우게 된다. 농기계와 트럭을 견인하고 농민들을 연행해 서울 진입을 원천봉쇄하려던 정권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야식ㆍ음료ㆍ핫팩 등을 가져와 농민들을 격려했고 법원이 중장비 동원에 제한을 두고 집회와 행진을 허용함으로써 농민들은 26일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11월 18일 전봉준 장군의 고향 전북 고창에 트랙터를 몰고 도착했을 때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봉기 지역들을 지나갈 때 이 녹두장군의 후예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전봉준 장군의 이송장면 생전모습.사진/뉴시스
 
서포와 법포, 또는 기포와 좌포
1894년, 부정부패한 양반집단ㆍ탐관오리의 척결과 사회개혁을 통한 보국안민, 그리고 나라의 주권과 자주독립을 위한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떨쳐 일어났다. 이 민중봉기가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혁명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세 차례의 봉기로 나누어지는데, 음력 1월 고부 봉기, 음력 3월 백산 봉기와 4월 전주성 점령(1차 동학농민봉기, 황토현 전투의 승리), 음력 9월 전주부의 삼례 봉기(2차 동학농민봉기, 우금치 전투의 패배)가 그것이다. 그 배경과 전개가 5쪽에 걸쳐 쓰인 다음의 시에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어 부득이 다소 길게 소개한다.
 
저 1850년대 조선은 난세
여기도
저기도 백성들이 궐기하였다
궐기해
관아 홍살문을 자빠뜨렸다
아전놈들
그 착취
그 행패로 살찐 모진 놈들 부수고
현감 군수를 쫓았다
곳간 문 열어
곡식을 나눠주었다
 
들녘은 백성이고
산골은 명화적(明火賊)이었다
 
바야흐로 썩은 나라
죽은 백성이
일떠 깨어났다
밖에서는 양귀(洋鬼)가 오고
왜적이 오는데
안에서는 온통 탐관오리뿐
이제야
이제야
배고픈 백성 일어났다
대발의 대 잘라
대창을 들었다
풀 베는 낫 드높이 들었다
 
이런 난세에 동학이 깨어났다
스승 최제우 뒤
두 상족(上足)
최시형
서장옥이 일어서니
그 둘을 따르는 백성들로
 
법포(法布)
서포(徐布)
법포는
법헌(法軒) 최시형의 호를 땄고
서포는 서장옥의 성을 땄다
 
각자 도당(道黨)을 두어
동학을 포덕(布德)하니
 
저 동학 궐기에
서포가 먼저 일어나니
이를 기포(起布)라
법포가 뒤에 있으니
이를 좌포(坐布)라
 
< … >
 
1892년 전라도 삼례집회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하니
이때
서장옥은 깃발같이 휘장같이
전라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들과
남접(南接)을 구축
그리하여
왕에게 상소 보낸다
그러나 어디 한양이 만만한 장터던가
그 집회가 실패하자
충청도 보은집회로
척양척왜를 부르짖고
전라도 김제 원평집회에서
다시 척양척왜를 외쳤다
 
일인들아
미국인들아
너희는 급히 너희나라로 가라
오는 3월 9일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가 토벌하리라
 
과연 동학 서포의 포부 과감하도다
마침내
1894년 갑오동학이 일어났다
일어나니
천지가 뒤집혔다
이로부터 조선의 기상
천년 중화도 가라
양귀도 가라
왜적도 썩 물러가라
이로부터 조선은 오직 조선일 따름
(‘서포’, 24권)
 
사실 이 뒤에도 시는 서포 서장옥에 대한 소개를 계속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부 어느 납작지붕 밑에서 / 태어나 / 법명 일해(一海)로 / 불교 승려 30년”의 삶을 살았으나 뜻한 바 있어 “동학에 귀의하여 / 최제우의 법통을 이으니 / 최시형과 / 법통 형제라”는 것, “법포는 동학 북접 / 서포는 동학 남접 / 서장옥 장로로 삥 둘러 / 남접 혁명가들 뭉쳤다“는 것, 그리고 “그뒤 / 동해 울진으로 숨었”다가 잡힌 서장옥이 “아침이슬 한방울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것이 그것이다(‘서포’, 24권).
 
최시형ㆍ손병희로 이어지는 법포-좌포-북접이 탐관오리 숙청이나 척양척왜를 공유하긴 하지만 최제우 교조의 신원 운동과 포교활동의 자유 등 동학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교권파로 무장봉기를 꺼려했던 반면, 서장옥ㆍ전봉준ㆍ김개남으로 연결되는 서포-기포-남접은 보다 적극적으로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반봉건 변혁세력이고 개혁파였던 셈이다. 이는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차이에도 기인했을 터, 교단의 지도자들이 이끌던 전자가 주로 부농층이었다면 후자는 빈농ㆍ몰락농민ㆍ천민들이었다. 따라서 해월 최시형의 법포는 ‘온건히’ 뒤에 앉아 있다가(좌포, 坐布) 나중에서야 전봉준의 청으로 마지못해 손병희가 북접을 이끌고 남접에 연합한 반면, 일해 서장옥의 서포는 먼저 일어나는 포(기포, 起布)인지라 전봉준ㆍ김개남을 지도자로 하는 남접의 전투성과 용맹함은 실로 핍박받던 농민의 현실에 더 절박하게 기초해 있었다 할 수 있겠다. <만인보>의 시인이 서포-기포-남접 혁명가들에 대해 더 많이 논하고 마음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황토현동학축제가 열리고 있는 전북 정읍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에 전봉준 장군 등의 흉상을 배경으로 관람객들이 자리를 옮기고 있다.사진/뉴시스
 
서장옥(?~1900), 전봉준(1855~1895), 김개남(1853~1894)
다음의 시들을 보면, 고은 시인이 확실히 서포-기포-남접의 지도자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불타오르는 사람 보라
이 물보라치는 사람 보라
이 물불 가리지 않고 사납게 나서는 사람 보라
서장옥
 
동학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하자
수원사람 서장옥이
넋 빠진 동학 교세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포를 짓는다
< … >
 
이 사람 보라
 
이 사람이야말로
장차 교조신원을 비롯하여
시국에 대처할 때마다
물러서기 좋아하는 해월과 갈라서서
머뭇거리기 좋아하는 해월 좌포와 맞서
언제나 마음속에
무쇠 탄환이 가득하였다
 
갑오 을미 앞둔 삼천리 백성들 들고일어서는 시절
그도 일어나
한가락 이룩하다가
공주 관아에 잡혀 금갑도 귀양살이로 떠나버린다
그러나 어찌 이 사람이
그 섬구석에서 얌전히 뻗어 있을쏜가
 
이 사람 서장옥의 추종 황하일이
전라도 포 맡았는데
바로 여기서 손화중이 입도한다
손화중을 통하며
드디어 전봉준과 맺어진다
 
1893년 3월 북접이 보은 장내리 집회를 열고
그해 5월 서장옥 전봉준 들이
김제 원평에서 서포의 대회가 열린다
이로부터 쫙 갈라져
하나는 시국의 수세이고
하나는 시국의 전위에 나서게 된다
과연 볼만하여라
 
이윽고 갑오농민전쟁으로 나아가는바
이에 앞서
서장옥의 기상을 보아라
혁파 없이
그 무엇도 이루어낼 수 없음이여
서장옥의 실행을 보아라
< … >
(‘서장옥’, 8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청군이 들어오자 청과의 조약을 빌미삼아 일본까지 군대를 끌고 온다. 조선의 지배세력이 자신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외국 군대와 손잡고 자기 백성을 짓밟는 작태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음은 서글픈 일이다. 오히려 농민군이 청과 일본에게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으니 얼마나 순수한 백성들인가. 그러나 결국 일본은 경복궁에 침입하고 친일내각을 만들어가면서 청일전쟁을 일으키니 동학농민군도 다시 봉기하게 된다.
 
마흔한살에 일어섰다
갑오년
농민군 총관령
나주
남원 운봉을 단숨에 점령
 
가장 전투적인 지도자였다
 
처음부터 집강소 따위
일본군과
고종 정부와의 타협 불가론자였다
 
10월 재거병(再擧兵)
1만 병력 몰아
금산
신탄진
청주성에 육박
 
연산으로 퇴각
태인으로 퇴각
 
전주 장대에서 사형 효수되었다
모가지 압송
서울 서소문 밖 3일간 효수
모가지 다시 압송
전주성 네거리 7일간 효수
 
처음 만나던 동지 아름다웠다
고부 전봉준
무장 손화중
금구 김덕명
백산 최경선
그리고 태인 김개남 아름다웠다
 
서로 상투 머리카락 뽑아
함께 태우고
서로 피 섞어
함께 뿌렸다
서로 만백성 용화세상 기약하였다
 
아름다웠다
< … >
그들의 패배가 조선의 근대 서리 찬 첫날밤이었다
(‘김개남’, 19권)
 
1894년 음력 3월 하순 고부의 백산에 모인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의 농민군이 발표한 격문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이어받은 ‘전봉준 투쟁단’은 지난 12월 8일 평택시청 앞에서 다시 출정식을 열고 상경해 9일 국회 앞 대통령 탄핵소추 집회에 참석했고 10일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2박 3일을 서울에서 지새웠다.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트랙터 옆에서 환호하던 시민들과, ‘농민가’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농민들, 집회가 끝난 후 길바닥에서 삼삼오오 컵라면을 먹던 남도의 농부들, 사진을 찍느라 손 시려 하는 필자에게 선뜻 자신의 핫팩을 주시려 하던 농부 어르신을 기억한다. 연이어 광화문으로 달려가 찬 겨울밤을 지새우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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