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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징벌적 손해배상 범위 확대…소비자 권익 신장될까
3월 30일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징벌적 배상’ 적용 법률 모두 7개로…배상배수 적어 실효성 의문
2017-04-17 08:00:00 2017-04-17 08:00:00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추가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3월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수천 명의 피해자를 낳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기업의 부도덕한 영업 행태를 규제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의 결과물이다. 이번 개정안 통과로 징벌적 배상이 도입된 개별 법안은 총 7개가 됐다. 2011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시작으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 등 6개 개별 법안에 징벌적 배상이 도입됐지만, 제조물 책임법은 적용받는 대상 기업 및 소비자가 광범위해서 도입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징벌적 손해배상 기원, 함무라비 법전부터 ‘허클’ 판례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은 가해자의 행위가 반사회적이면서 악의가 있을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배상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다. 입법 목적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피해자에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 돌아가게 하면서 ▲법 위반에 대해 징벌의 효과를 내고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해행위를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것이다.
 
징벌적 배상의 기원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 중 하나라도 훔쳤다면 그 값의 열배로 보상해야 한다’는 구절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고조선, 고구려, 부여의 법에도 4~12배 배상 조항이 있었다. 비록 현대적인 의미의 피해자 권리 회복 개념은 없었지만, 배수적 손해배상과 형벌 개념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징벌적 배상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으로 현대적인 틀을 갖춘 것은 1763년 영국의 ‘허클’ 판례부터이다. 영국의 인쇄공 허클(Huckle)은 왕실을 비난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시간 감금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허클은 자신이 하루 동안 일을 못한 것과 숙련공으로 얻었던 명성에도 흠이 생겼다는 사실을 법원에 호소해 정부로부터 20파운드를 배상받았다. 당시 20파운드는 허클의 하루 임금의 1700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 사건에서 판결문에 ‘징벌적 배상(exemplary damages)’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허클을 체포한 경찰관의 행위가 악의적이었고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줬으므로, 하루치 임금에 해당하는 재산상 피해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후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 국가들에서 이 제도가 활발하게 도입됐다. 미국은 반독점법 등 5개 법에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을 가지고 있다.
 
BMW 200만달러, 필립 모리스 7950만달러…천문학적 배상금 물어
비교적 최근 사례로는 1996년 고어 사건 판례가 유명하다. 미국의 아이라 고어는 1996년 BMW 스포츠 세단을 4만750달러에 구입했다. 그런데 구입 9개월 후에 자기 차량이 출고 전 발생한 문제로 도색을 다시 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상적으로 재도장이 된 차는 완전한 새 차보다 10% 정도(이 경우 약 4000달러) 가치가 떨어진다. 고어는 손해배상액으로 400만달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으로부터 200만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대법원이 배상금을 200만달러 감액한 이 사건은 징벌적 배상금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감액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 판결 이후로 미국의 평균 징벌손배액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윌리엄스 대 필립 모리스’ 사건은 미국 담배소송 중 가장 높은 징벌적 손해배상금이 확정된 판례다. 이 사건은 미국 법원이 흡연문제에 대한 담배회사의 책임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시 윌리엄스는 1950년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부터 1997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47년 간 필립 모리스의 대표 제품 말보로를 피웠다. 1996년 10월 그의 오른쪽 폐에 발병했던 것은 수술 불가능한 ‘선암’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이러한 종류의 암의 주요 원인이 오랜 기간에 걸친 흡연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윌리엄스가 수 차례 금연을 시도했지만, 담배의 심리적 중독성 뿐 아니라 생리적 중독성이 함께 작용해 흡연을 그만둘 수 없었다는 사실도 인정되었다.
 
윌리엄스의 유족은 1998년 10월 오리건주 포틀랜드 멀트노마 카운티 법원에 필립 모리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이듬해 3월 30일 배심원들은 필립 모리스에 대해 윌리엄스 가족에게 보상적 배상 82만1485달러, 그리고 징벌적 배상 7950만달러를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그런데 5월 20일 담당 판사인 안나 브라운은 “지나친 응징은 위헌”이라며 징벌적 배상액을 3200만달러로 감축했다. 이에 원고(유족) 측과 피고(필립 모리스) 측 모두 항소하여 오리건주 항소심 법원, 미국 연방대법원을 거치는 법정 싸움 끝에 2009년 3월 31일 필립 모리스의 세 번째 상고가 기각되면서 징벌적 배상금 7950만 달러에 10년치의 이자를 부가한 1억5500만달러가 최종 확정됐다.
 
‘개인의 이익 보호’와 ‘사회적 이익 보호’ 함께 추구…위헌성 논란도
원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손해배상의 범위 및 위자료 산정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용되는 제도였다. 이는 현행 민법상 손해배상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영미법계에서 판례를 통해 이용되는 제도였다. 오늘날에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대기업이나 국가 등의 위법행위로 인한 집단적 소송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추세를 보인다.
 
모든 법은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이 존재한다. 징벌적 배상 제도가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은 일반 손해배상법과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일반 손해배상법은 피해자 개인의 재산과 정신적 안정을 주된 보호법익으로 한다. 반면 징벌적 손해배상은 개인의 재산권이나 정신적 안정이라는 민사법상의 보호법익 이외에도 ‘징벌을 통한 유사한 불법행위의 재발방지’라는 형벌이론을 도입, 사회적 이익의 충족을 보호법익으로 한다. 민사법이 추구하는 ‘개인의 이익보호’와 형사법이 추구하는 ‘사회적 이익보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법제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공익을 위해 행사해야 할 징벌권과 예방기능수행의무를 민간에 이양시키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법의 이중처벌금지조항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악의적인’ 불법행위에 대해 부과되는 것으로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 외에도 관련법에 따라 형사처벌이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 이는 이중처벌에 해당한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미국 연방법원은 판례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였음에도 다시 형사처벌을 가하거나, 사후 징벌적 손해배상을 가할 때 형사처벌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한국 도입 효과 적어…적은 배상금이 문제
국내에 징벌적 배상이 처음 도입된 것은 2011년 3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이 입법되면서부터이다. 하도급법에서는 원사업자가 기술유용 행위를 해 수급사업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그 손해의 3배까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규정하고 있다. 통상 원사업자 쪽인 대기업이 수급사업자인 중소기업의 기술을 갈취하거나 유용하는 사례가 빈번하자 만든 조항이다. 하도급법을 기준으로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이 도입된 지 6년이 넘었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단 두 차례이다. 그마저도 징벌적 배상이 판결까지 이어진 경우는 없어서 실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활성화하지 못하는 이유로 배상액 규모가 너무 작다는 점이 꼽힌다. 3월 30일 통과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포함, 7개 개별법안 모두 배상액을 ‘손해액의 최대 3배’로 일괄 규정하고 있는데, 배상 금액이 적어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하는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급사업자나 파견근로자 입장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계약 취소 내지 단절을 각오해야 하는데, 이런 손해를 감수하면서 소송에 나설 만큼 충분한 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배상액 규모가 적으면 잘못을 저지르면서 취득한 재산상 이익이 피해 보상액보다 많아지는데, 이 경우 범죄 예방 효과가 떨어진다. 일례로 홈플러스는 경품행사를 하면서 응모자 개인정보를 보험회사에 팔아 232억을 챙겼으나,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부과한 과징금은 4억3500만원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1심과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으나 대법원이 이를 기각, 현재는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낸 상태다. 홈플러스가 최종 패소해 책임자들이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기업 차원에서는 벌어들인 돈 232억에 비해 과징금 및 배상액의 금전적 부담이 많지 않아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적을 수 있다.
 
징벌적 손배 실효성 높이려면
징벌적 손해배상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일단 법체계상 일반법인 민법에 징벌 배상제를 넣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징벌적 배상 제도는 하도급법, 개인정보보호법 등 개별 법률에 도입된 것이었다.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을 민법의 일반조항으로 포함시키면 특정 법률을 적용하지 않고도 고의·악의적인 불법행위 또는 피해 가능성을 인지했음에도 피해를 발생시킨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징벌적 배상제도를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다양한 유형의 불법행위를 포함 불법행위 전반에 걸쳐 동종 또는 유사한 불법행위의 재발방지와 다양한 피해자 간 형평을 기대할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징벌적 배상을 “응징과 억제를 위해 민사재판의 배심원에 의해 부과되는 사적 벌금”이라고 정의, 다양한 민사 사건에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 입증 책임 완화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현행법상 징벌 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입증 책임은 문제를 제기하는 원고, 즉 피해자에게 있다.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은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일반인이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 입증 책임 완화는 이런 경우 결함을 증명하지 못해도 ‘합리적 추정’만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다. 2012년 법무부 제조물 책임법 개정위원회가 마련한 시안에는 ▲정상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고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에서 초래됐으며 ▲제조물 결함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증명하면 결함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했다.
 
집단소송 확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집단소송제도는 피해자 일부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면 그 효력이 별도의 판결 없이도 동일한 피해자들에게 적용되는 제도다. 해외 사례를 보면 징벌적 배상 제도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국가 또는 기업의 위법 행위를 제재하기 위해 도입된다는 점에서, 개인보다 다수에 의한 집단소송의 경우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 개인이 피해 구제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비용부담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 일부가 승소해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소송제가 효과적이다. 국내는 2005년부터 증권 관련 집단소송만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를 제조물 등에도 확대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지난 3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회원 등이 옥시제품 2차 불매 운동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응형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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