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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맛의 인문학)①떡국: 시간의 욕망들 사이의 상충을 살뜰하게 보듬다
입력 : 2016-02-11 오전 6:00:00
오늘부터 <안치용의 맛의 인문학>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토마토CSR연구소장과 (사)2.1지속가능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는 안치용 소장의 ‘맛의 인문학’은 음식과 맛을 통한 사회적 통찰과 인문적 사유를 독자 여러분께 전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합니다. <편집자>
 
우리 개가 가끔 고개를 삐뚤 하며 나를 응시할 때가 있다. 눈길로 대꾸하며 소통을 꾀하지만, 두 시선의 합일로 획득되는 분명한 의사(意思)는 없다. 네가 보니까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보니까 네가 보는 게다. 우리 개가 고개를 기울일 때 나는 가끔 기울어진 지구의 지축을 생각한다.
 
남극과 북극을 연결한 가상의 선, 지축은 황도면에 대해서 23.26도 기울어져 있다. 이 삐뚤어짐이 공전에 따른 태양열 흡수의 차이를 만들어내 지구 전역에서 사계절을 가능케 한다. 지축의 기울어짐이 없었다면, 지구상의 모든 곳은 아마도 고정된 기후 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위 38도에 허리를 둔 우리 한반도는 일 년 내내 봄이었을 테니 지축이 기울어지지 않은 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계절의 구분이 사라지고, 절기가 사라진다. 지구의 공전이 있고 달의 공전이 있으니 그래도 설날은 살아남겠다. 그때 설날은 지금처럼 역법에 입각하여 나름 과학적으로 책정될 수가 없겠고, 달이 완전히 기울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임의의 시점을 선택하여 결정되지 않을까. 아마도 별자리를 잣대로 설날을 간택하지 않을까. 신화와 전설이 공동체적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하는, 특별한 별자리를 똑바로 우러르는 지구 공전궤도의 어느 지점에서 새로운 설날을 결정하는 상상.
 
보바리 부인의 일기장 안에서나 존재할 법한 그런 상상의 설날이 온다 하여도 설날에 부여된 과세(過歲)의 의미는 여전할 것이다.
 
설은 사실 독자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금융으로 치면 파생상품이다. 지나간 특정한 시간의 덩어리와 다가올 미확정 시간의 덩어리의 접면(接面)에 불과하다. 시간의 욕망들 사이의 상충을 살뜰하게 보듬어 삼가는 태도로 형식화한 것이 설이다.
 
설날엔 떡국을 먹는다. 동양문화권에선 명칭이 달라도 일반적으로 설을 쇠는데, 떡국을 먹으면 우리나라 사람이다. 과세의 음식인 설 음식을 한자로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의 대표 격인 떡국을 먹어야 우리나라에선 나이 한 살을 먹는다. 지축이 23.26도 기울어진 현 지구에서 설이란 문화형식이 어느 정도 보편적 현상이라면 떡국을 먹는 풍습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세시풍속이랄 수 있다. 그러나 왜 우리가 떡국을 먹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강점기에 최남선은 “새해 첫날은 천지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인만큼 정결한 흰떡과 자극적이지 않은 국을 먹으며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했다”고 우리 민족이 설에 떡국을 먹는 이유를 설명했다.
떡국의 유래를 제시하는 거의 모든 글에는 최남선의 이 설명이 등장하는데, 기실 설명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민족이라서 세찬으로 떡국을 먹는다기보다, 세찬으로 떡국을 먹으니까 우리 민족인 것이다.
 
세찬의 대표 격인 떡국을 먹어야 우리나라에선 나이 한 살을 먹는다.
 
떡국의 유래에 관해선 대부분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1937∼1946)」을 비롯, 「동국세시기(1849)」, 「열양세시기(1819)」가 인용된다. 그렇지만 떡국을 언제부터 먹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동국세시기」에는 “흰떡을 엽전과 같이 잘게 썰어서 간장국에 섞어서 쇠고기와 꿩고기와 고춧가루를 섞어 익힌 것을 병탕(餠湯)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떡국이다. 대표적인 제례음식으로 설날 아침에 먹었으며, 손님에게도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떡국을 상고시대의 새해 제사 때 먹던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 ‘상고’가 엄밀하게 고증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우리민족이 조선 중기에 떡국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예전에는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여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 하였다. 해석이지만 떡국의 핵심재료인 가래떡의 길고 가는 모양과 관련하여 떡국에 무병장수의 기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흙수저’와 “꿩 대신 닭”
떡국에 넣는 떡은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상징하기에 어슷하게 썰지 않고 동그랗게 썬다. 동전 모양으로 잘라 넣는 가래떡은 모든 떡국의 기본이고 육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떡국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꿩 대신 닭”일 것이다. 옛날에는 떡국 국물을 꿩고기로 우려내었다고 한다. 꿩고기를 구하기 어려운 집은 대신 닭고기로 육수를 내었다. 이런 배경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꿩 대신 닭 정도이면, ‘금수저’ 대 ‘흙수저’에 비하면 참아줄 만하다.
 
떡국 중에 특수 사례로 반드시 거론되는 게 조랭이 떡국이다. 개성지역에서 누에고치 모양의 조랭이 떡국을 끓였는데, 그 유래는 조롱이다. 조롱은 과거 어린아이의 주머니 끈이나 옷끈에 액막이로 찬 것으로, 액(厄)을 막아준다고 한다. 개성에서 정초에 떡국에 들어가는 떡의 모양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액을 막고 누에고치가 상징하는 길(吉)을 불러들이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조랭이 떡국에 망국의 한이 서려있다는 이설(異說)은, 조선 개국 이후 고려의 수도 개성 사람들이 사무친 원한을 풀자고 가래떡 끝을 비비 틀어서, 즉 이성계의 목을 자르고 싶다는 원을 담아서 떡국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한때 그 대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랭이 떡국이 도요토미의 목을 자르고 싶다는 절절한 원한의 음식이 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설 음식으로 우리의 떡국과 비슷한 오조니[お雜煮]라는 걸 먹는다. 야채ㆍ생선ㆍ고기 등을 넣은 국물에 떡을 넣고 끓인 요리로, 떡국과 기본 형태가 같다. 한국과 동일하게 일본에서도 설에 오조니를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생각한다. 이 풍습은 14세기 무렵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국에 토란을 넣었으나 나중에 떡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처럼 국물에 넣는 재료나 끓이는 방법은 지방이나 집안마다 다르다. 크게 관동식과 관서식으로 나뉘는데, 관동지방에서는 국물을 간장으로 맛을 내고 네모난 모양의 떡을 넣으며, 관서지방에서는 미소 된장으로 국물을 내고 둥근 모양의 떡을 넣는다.
 
나는 정말로 떡국이 먹고 싶었다
어렸을 때 설날은 복닥복닥했다. 그 전날부터 도착한 형님 부부들과 조카들로 집안은 만원이었고, 어머니와 형수들이 제수 장만에 분주한 가운데 남자들은 벌써부터 술상을 펴놓고 명절마다 반복한 옛날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였다. 요즘 남자들로선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감히 기도할 수 없는 장면이나 그땐 그랬다. 그러다 보면 밤이 이슥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잠결에 아버지가 현관문을 나섰다가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 다시 잠들었다. 설날이나 중요한 날에 여자가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재수가 없다는 속신(俗信)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예방 차원에서 대주인 아버지를 깨워 그날 아침 제일 먼저 대문을 통과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중요한 날에는 꼭 준수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학입학 시험을 치는 날 같은 때였다.
 
나에게 설날 아침은 전날 늦게 잠들어 항상 허둥지둥하는 시간이었고, 또 차례 상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여럿이(남자들만!) 둘러앉아 늦은 아침을 먹을라치면 막상 젓가락 둘 곳을 찾지 못하여 ‘번민’하는 시간이었다. 제사음식이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이것저것 풍성했지만 모든 음식이 하얀색이었기에 설날 내가 선택한 음식은, 무 고사리 등 이런저런 나물들을 넉넉하게 밥 위에 올리고 참기름과 고추장으로 버무려 먹는 비빔밥이었다.
 
나름 강한 ‘뼈대’를 자랑한 우리 집안은 설 제사에서 떡국을 쓰지 않았다. 일관되게 밥과 탕국이 올라갔고, 생선과 닭 등은 모두 쪄서 제상에 올렸다. 육해공군이 총집결한 탕국의 맛은, 차례를 지내러 온 친척들로부터 늘 감탄을 자아냈지만 나에겐 그냥저냥 먹을 만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떡국이 먹고 싶었다. 세찬이 비빔밥인 나에게 설날에 떡국을 먹는 집이 얼마나 부러웠을지. 어려서 설날에 떡국을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나는 어른이 되고도 오랫동안 철이 들지 않아 고생하였다.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된 어머니에게 그 일로 아직까지 항의하는 걸 보면, 어릴 때 떡국을 안 먹은 후유증은 예상보다 심대할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김광규 시인이 최근 11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을 출간하였다. 이제는 노쇠하여 떡국을 씹어 드실 수 없게 된, 어린 나에게 떡국을 끓여주지 않은 노모에게 늙은 시인의 시를 읽어주고 싶지만, 아직은 그냥 그렇지 싶다.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섣달그믐날 시작해서/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한 해가 걸렸네요/엄마 그래도 괜찮지?/(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시달려/이제는 손까지 못쓰게 된 노모가/외할머니 차례 상에 술잔 올리며/혼자서 중얼거리네)/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귀에 익은 목소리 들려와/가슴 막히도록 슬퍼지는 때/오늘은 늙은 딸의 설날/까치 까치 설날은/어저께였지
―오른손이 아픈 날
 
예전에는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여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 하였다.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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