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나는 원시 인류가 하늘을 향해 쇠옹두리보다 훨씬 커 보이는 동물의 뼈를 하늘로 던지는 장면을 기억한다. 영화에서 그 뼈는 공중에서 우주선으로 변신한다. 자연과학 용어로는 그저 ‘탄소순환’의 한 장면일 수 있겠으나 우리 인간이 원소 너머 비(非)탄소적 삶과 사유를 모색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설렁탕은 단지 뼛국이 아니라 우주선만한 무게의 기억으로 살아남지 않을까.
삽화/김희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의 김 첨지는 병들어 누운 아내에게 따뜻한 말 제대로 못 건네는 무뚝뚝한 성격이다
. “설렁탕이 먹고 싶다
”는 아내에게 대뜸 욕부터 뱉고 본다
. 그렇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운수 좋은 날
’에 설렁탕을 사들고 귀가하는
‘나름
’ 자상한 남편이다
.
나름에 서둘러 강조의 작은따옴표를 붙어야 하는 이유는 김 첨지의 ‘속정’을 자상하다고 평가했다가는 소설의 시점이 일제시대임을 감안해도 가부장적이라고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꼭 욕먹을까 걱정한다기보다 50대 남자인 나 스스로도 그렇게 비뚤어진 ‘자상’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팍팍한 삶을 살아낸 못난 가장의 자기방어기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김 첨지는 인력거(人力車)꾼이다. 사람이 탄 수레를 끄는, 지금은 없는 직업이다.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 같은 데서 리어카에 사람 대신 짐을 실어 나르는 짐꾼은 아직 목격되지만 사람이 사람을 운반하는 과업은 자동차에 넘겨졌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이전에, 말이나 소가 하던 일을 사람이 하였으니 얼마나 고단했고, 또 얼마나 천대받았을까. 형태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적잖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일한다.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우직하지만 ‘못난’ 가장은 예나 지금이나 흔하다. 달라진 풍경이라면 노동의 종류가 달라졌고, 가장에 이제는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고통의 평준화ㆍ획일화를 통한 왜곡된 남녀평등의 진전인 셈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제 사회가 온존한 가운데 테스토스테론이란 남성 호르몬에 여전히 지배받는 생물학적 남성이 가장의 지위와 불화할 때 흔히 비애에 빠지며, 그 비애가 가부장적 문법이 아닌 인간적 문법에서 더 보편적 고통을 표상한다고 주장해도 가부장제적 해석이란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 김 첨지로 형상된 못난 가장의 억지 자존과 남루한 자상은 현진건 시대에만 목격되는 옛 풍경이 아니기에 말이다.
논의를 확장하면 인간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잘 나지 못한 수컷과 짝짓기를 한 모든 암컷은 모든 생명종을 망라해 김 첨지 아내와 같은 고초를 겪기 마련이다. 살아서 번성하라는 지엄한 명령에 복속된 포유류 수컷 중 힘없고 무능력한 수컷의 생존법은 소설 속 김 첨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힘없고 무능력한 수컷과 짝을 지은 불우한 암컷의 삶은 김첨지 아내와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사자 등 적잖은 포유류 세계에서 힘없고 무능력한 수컷에게는 교미권 자체가 부여되지 않는 형편이니, 남루한 수컷 가장의 원초적 비애와 이것과 결부된 암컷의 불가피한 우울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현상일지 모르겠다.
철(Fe)과 탄소(C)
인간적인 현상은 인간 여성의 생리에서도 발견된다. 인간 여성은 다른 포유류 암컷에 비해 월경을 통해 많은 혈액을 배출한다. 인간 여성이 이처럼 비효율적인 생리행태를 갖게 된 데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신통한 설명은 없다. 반면 이 비효율을 극복하기 위한 대처와 관련해서는 인류학에 그럴듯한 설이 있다. 사회계약설에서 ‘최초의 인간’을 상정하듯, ‘최초의 여자’가 사냥꾼 남자와 계약을 맺었다는 설명이다. 거래가 성립되면서 인간 여성은 사냥꾼 남성으로부터 고기를 공급받아 철분을 규칙적으로 보충하고 대신 남성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출산ㆍ육아를 전담하게 되었다는 성역할 분담이다.
이후 철은 ‘최초의 여자’의 자궁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농기구ㆍ무기로 제조되어 인간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게 되니, 철이 문명의 기본구조를 결정지었다고 살짝 과장할 수도 있겠다. 지표면의 5000Km 아래에서 지구의 외핵을 구성하고, 녹은 채로 흐르며 지구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물질 또한 철이라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논리적인 연결점은 없지만 왠지 설득력이 훨씬 더 커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원자번호 26번 철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탄소야말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간이다. 지구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생명체는 모두 탄소 기반 생명체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탄소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해 생명체를 안출해 내기에 탄소는 “생명체의 만능 ‘덕트 테이프(duct tape)’”로 불린다. 복잡한 생화학적 설명을 생략하고, 단순히 탄소가 인체의 18%를 차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탄소의 핵심적 기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삼대원소는 탄소 외에 산소(65.5%)ㆍ수소(10%)인데, 산소와 수소가 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물을 구성한다면 탄소는 실질적인 구성체를 만들어내는 중심이다. 반면 붉은 빛 철이 인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04%에 불과하다.
‘최초의 여자’가 사냥꾼 남자와 맺은 계약은 사실 탄소공급 계약이었고, 철은 부수적 내용에 불과했다. 피의 선명한 색깔이 착시를 불러온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철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산소 탄소 수소 외에 칼슘 인 나트륨 철 등은 필요량의 차이가 있지만 생명체 구성과 생명활동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이러한 성분을 대체로 동식물을 통해 섭취한다. 탄소기반생명체를 먹어 탄소기반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구상의 자연은 ‘탄소순환’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스탠리 큐브릭과 Homo Faber
탄소는 원자번호 6번으로, 불타는 별 속에서 헬륨(Heㆍ원자번호 2번) 세 개가 융합되어 생성되었다. 인간이 경험한 적이 없고 그저 최근에 와서야 상상할 수 있게 된 고온ㆍ고압에서 탄소가 만들어졌다. 지구상의 모든 것이, 지구 자체도 별의 잔해로 구성되었으니 탄소의 우주기원설이 새삼스러울 게 하나 없다. 따라서 우주생물인 인간이 도도한 ‘탄소순환’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아 이처럼 번성한 이유는 월경의 사례 같이 때로 적잖은 비효율이 목격되지만 대체로 삶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서 나는 원시 인류가 하늘을 향해 쇠옹두리보다 훨씬 커 보이는 동물의 뼈를 하늘로 던지는 장면을 기억한다. 영화에서 그 뼈는 공중에서 우주선으로 변신한다.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을 상상하자면 공중에 떠올랐다가 중력에 의해 낙하한 거대한 뼈는 마침 뾰족한 바위 같은 데 떨어져서 여러 쪽으로 부서진다. 정글의 숲천장에서 비교적 평안한 삶을 누리다가 맹수가 들끓는 초원에 발을 내딛은 원시 인류에게, 부러진 뼈는 작지만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피에 물 들은 붉은 빛 고기만큼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숨겨져 있다가 누렇게 흘러나오는 골수는 새로운 먹거리이자 일종의 구황식품이었다. 사람을 기준으로 뼈의 구성성분을 살펴보면 칼슘 인 등 무기질 45%, 단백질 등 유기질 35%, 수분 10%이다. 활용하기에 따라 뼈가 충분히 훌륭한 식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원시인류는 골수를 먹기 위해 아마도 돌을 들었을 것이다. 석기의 등장이 골수의 섭취와 명백한 연관을 맺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시기상으로 겹쳤으리라는 점은 손쉽게 추정된다. 도구적 인간(Homo Faber)의 출현에는 막연하지만 골수에의 욕망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어머니의 속임수
한국인은 골수뿐 아니라 뼈 자체를 통째로 먹거리로 전환시켰다. 우리의 대표적 음식 설렁탕은 한마디로 뼛국이다. 뼈를 푹 고아서 골수 뿐 아니라 뼛속의 영양성분을 우려내서 먹는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에 푹 고은 뼛국은 흔한 영양식이었다. 지금에서야 설렁탕을 즐겨먹지만 어린 나는 뼛국을 싫어했다. 지금보다 월등하게 예민한 후각 때문이었을 터인데, 어린 나는 그 뽀얀 국물을 마다해 어머니 속을 타게 만들었다. 대신 시금치나 아욱, 또는 우거지를 넣은 된장국은 언제나 잘 먹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에게 영양가 많은 뼛국을 먹이려고 내가 먹을 된장국에다 뼛국 한 국자를 몰래 추가하여 한소끔 끓여서 아무 일 없는 듯 내오곤 하였다. 그러나 때로 어머니의 욕심이 과하여 속임수가 들통 났다. 아들에게 뼛국을 조금이라도 더 먹일 생각에 적정량보다 많은 뼛국을 된장국에 섞다보면 어린 내 미각에 적발되어 결국 뼛국을 한 방울도 못 먹이는 사태가 빚어졌다.
장성한 나는 설렁탕을 즐겨 먹는다. 내 아들은 어려서부터 설렁탕을 잘 먹었다. 자주 가는 신사동 영동설렁탕 같은 데서 넉넉하게 올린 고기와 적당한 국수사리까지 설렁탕 한 그릇을 후루룩 비워낸다. 어느 때부터인가 제 몫의 공깃밥을 다 먹고 절반가량 남아있는 내 공깃밥마저 뚝딱 해치운다. 식성에 준거하면 아들은 나보다 월등한 효자다. 직접 고지 않고 사주는 설렁탕을 저리 잘 먹는다.
요즘 내가, 내 아들이 설렁탕을 즐겨먹는 반면 어머니는 설렁탕이든 곰국이든 그러한 종류의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한다. 농후한 국물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서이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예민해서 못 먹는 게 아니니, 된장국 같은 데에 한 국자 몰래 섞어 넣을 도리가 없다.
옛날 어머니의 속임과 이즈음 나의 속이지 못함이, 자연과학 용어로는 그저 ‘탄소순환’의 한 장면일 수 있겠으나 우리 인간이 원소 너머 비(非)탄소적 삶과 사유를 모색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설렁탕은 단지 뼛국이 아니라 우주선만한 무게의 기억으로 살아남지 않을까.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